나는 10여 년 동안 직장을 출퇴근하며 생활하다가 갑작스레 병원 신세를 졌고, 이후 홀로 생활한 지 5년째 흘러가고 있다. 매일이 매일 같은, 요일도 계절도 잃어버린 철저히 혼자인 외딴 시간이 아무렇지 않게 흘렀다. ‘잠시 멈춤’이라 하기엔 장대한 날들이었고, 거리를 두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멀어져갔다. 아는 사람은 알던 사람이 되었으며, 친구란 어감의 온기도 싸늘하게 식어만 갔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사실 진짜 의미의 ‘혼자’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 p.5, 「프롤로그: 잠시 멈춤, 그 후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멈춤’이라는 말은 초라하고 외롭게 울리는 말이지만, 나는 요즘 종종 ‘나’에게 멈춰 본다. 혼자가 된다는 건 뉴스에서도, 잡지에서도 시끄럽게 떠드는 키워드가 되어버렸지만, 내게만 그려지는 혼자를 생각한다. 갑작스러운 브레이크 이후 회사도 다니지 않는 내게 유일한 수확이 있었다면, 그건 나라는 이름의 혼자, 그곳에 펼쳐지는 내일을 향한 작은 설렘과 바람 같은 것이었다. ‘멈춤’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지만 결코 물러서는 걸음이 아니다. 나는 이제야 그 머무름의 내일을 알 것만 같다.
--- p.10, 「프롤로그: 잠시 멈춤, 그 후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조금 더 시시하게 이야기를 풀어 보면, 이효리가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은 왜 그리 금세 끝나고 마는지, 우리 엄마는 2시간 넘게 방송하는 《미스터 트롯》을 보고도 왜 그리 아쉬워하시는지, 반면 우리 동네 38번 버스는 왜 그리 늦게 도착하는지. 집에서 생활할 땐, 나름의 시간, 나름의 스피드, 나름의 질양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 p.45, 「넷플렉스엔 나와 닮은 타인이 산다」 중에서
왜인지 기분을 망쳐버린 날의 청소는 다 끝난 하루도 살려내는 ‘건강한 착각’의 효과도 있다. 죽은 식빵도 살려낸다는 발뮤다 토스터기의 그런 효과 같은. 청소는 또 한 번의 기회, 다시 시작하는 찬스 같은 ‘허드렛일’이기도 하다. 여전히 내게 빗질과 걸레질은 좀처럼 쉽지가 않지만, 나는 청소를 하며 어제를 돌아본다. 땀을 닦으며 내일을 만나러 간다.
--- p.58, 「청소를 시작하니 내 역사가 튀어나왔다」 중에서
입지 않는 옷은 버려야 한다는 정리의 법칙이 있다. 마음이 식었다면 버려야 한다는 콘도 마리에식(式) 정서적 접근법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 입지 않던 옷을 한 해, 두 해가 지나 가장 아껴 입는 일이 더러 있고, 새로 산 셔츠에 찰떡같이 어울리는 바지는 몇 해 전 사놓고 몇 번 입지도 않았던 데님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입지 않는 옷을 버린다’는 방식도, ‘버리기 전 마음에 물어 보라’는 콘도 마리에 여사의 물음도 요리조리 피해가며 쌓아둔 옷들이, 내겐 제법 많다. 그러나 돌연 들이닥친 코로나. 당장 내일 일도 확신할 수 없게 된 시절에 내년, 후년, 그리고 ‘지금 말고 언젠가’는 얼마나 무력한 말들인가. 얼마나 애타는 기다림인가. 내일이란 때로 가장 가깝고 가장 먼, 알 수 없는 하루의 이름이곤 하다.
--- p.63, 「내 옷장의 지각변동」 중에서
수업 후 바로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말을 어기지 않아도 나만의 ‘샛길’을 걸을 수 있었고, 등하교 왕복 2시간이라면 혼자만의 시간으로 충분했다. 수업 이후 기다리고 있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시간들. 마음속 그 시간의 질량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어쩌면 그 길목이 나의 성장 무렵이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p.86, 「내 마음의 재개발」 중에서
코로나19가 터지고 모임이 자제되고 노래 교실이 문을 닫은 뒤, 《미스터 트롯》을 틀어놓고 계신 엄마를 보며, 난 엄마의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엄마의 일상이 왜 하필 이제서야 보이기 시작했을까. 나의 엄마가 아닌 엄마 자신의 계절이 보고 싶었다.
--- p.162~163, 「엄마의 가계부」 중에서
비가 살금살금 내리던 아침, 나이키 윈드브레이커를 입고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웠다. 비가 거세질까 총총걸음에 아파트에 들어서니 엘리베이터의 열린 문 사이로 내가 알던 남자가 보였다. 매일같이 같은 옷에 같은 모습으로 담배를 피고 있던 남자. 여느 때와 마찬가지의 티셔츠와 야구 모자와 칙칙한 피부 톤. ‘탈까 말까’ 고민을 하면서도 몇 걸음을 걸었는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기다려주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티셔츠엔 내가 아는 영국 신사의 로고, 폴로의 상표가 그려져 있었고, 문양도 생각(오해)했던 것과 미세하게 달랐다. 지나칠 땐 몰랐던 것들. 세상엔, 가까이서 봐야 보이는 그림이 있다. 근데 이 반전은 현실일까, 그 너머의 현실일까. 창밖엔 아직 비가 내리고 있었다.
--- p.182, 「오늘은 문득 하늘이 보고 싶었다」 중에서
집에는 집에서의 생활이 있는 것처럼, 코로나 시절엔 코로나 시절의 일상이 있다. 그 둘은 서로 묘하게 닮고도 달라 간혹 책임 소재를 두고 홀로 애달파질 때도 있다. 3월 예정이었던 마감이 아직도 지지부진한 건 나의 태만 탓인지, 코로나의 ‘거리 두기’ 탓인지. 다들 ‘홈트’가 유행이라는데 고작 10분 운동도 지속하지 못하는 건 나의 체력 문제인지, 코로나의 ‘자숙 무드’ 때문인지. 하지만 이 둘 사이의 ‘묘하게 닮은 부분’, 반전의 숨은 자리, 그 공통점은 자꾸만 나를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는 쉬지도 않고 ‘열일’ 중인데, 너는 뭐하고 있니. 뭐 이렇게 까발려지는 자기 모순 같은 것들.
--- p.208, 「만약, 코로나가 그저 한 번의 비수기라면」 중에서
세상은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한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두면서 ‘위드 코로나’란 말을 꺼내들었다. 마치 다시는 어제의 일상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오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영어로 함께를 의미하는 ‘위드’는, 분명 온기를 더하고, 마음을 건네고, 혼자가 아닌 ‘더불어’를 그려내는 두 글자인데, 어쩌다 코로나란 말 앞에 붙어버렸다. 지금의 힘듦을 주도한 그 불명의 역병이 하필 우리와 함께하려 한다.
--- p.217, 「그 영화의 역사는 나의 39년보다 길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