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들도 Z들도 동의하지 못하는데 오로지 X세대나 86세대 출신 윗분들께서만 노래를 부르는 ‘요즘 MZ세대’는 그래서 너무나 모순적이다. 애초부터 한 덩어리가 아닌 ‘30년 범위의 젊은이들’을 한 데 납작하게 눌러 버렸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정작 우리가 공유하는 속내와 생각들은 감춰지고, 우리의 차이점은 흐려진다. 그런 세태에 질려 버린, 별로 다정한 성격이 못 되는 91년생은 ‘MZ 세대론’의 파도 한가운데서 “아, 진짜 그거 아니라고!”를 조금 외쳐 보고 싶었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결과를 받아 든 뒤에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게 의외로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모나다고 자책했던 내 모습이 많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이라는 걸 알고 위로받기도 한다. “생각했던 이상이 이뤄지지 않으면 갑자기 깊은 나락으로 빠져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단점을 지적받을 때는 마음이 좋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스스로 회복하는 편”이라는 서술에는 응원을 받은 듯 힘이 난다. 각종 보완 텍스트나 전문적인 공식 검사를 찾아 다니며 ‘자아 탐구’에 적극적으로 몰입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내가 싫어했던 내 모습을 직시하며 보완하고, 부러워했던 남들의 성격에도 사실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은 결국 상처 입은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INFP인 내가 싫지 않아요」중에서
젊은 세대의 표를 더 얻기 위해서든, 돈을 더 벌기 위해서든 진정성이야 어떻든 ‘친환경 바람’ 자체는 없는 것보단 낫다. 어차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밀레니얼이, 이어서 Z세대가 정치, 사회, 경제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고 생태주의도 보편적 가치관이 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환경’이라는 단어가 마치 ‘내년 S/S 시즌 유행은 플로럴 패턴’처럼 ‘젊은이들의 힙한 유행’의 맥락으로 소비되는 모습을 계속 지켜봐야 할 것만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그 시간이 오기 전까지 이면에서 벌어지는 파괴적이고 착취적인 행위들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 채식을 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동물 권리 증진을 주장하는 등 쉽지 않은 주관을 지켜 나가며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구경하노라면 무력감이 조금은 잦아든다. 친환경은 한 시절의 유행이나 특정 집단의 선호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임을 이해하는 사람들, ‘그린슈머 MZ세대’ 따위의 표현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는, 아니, 더 많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환경이 MZ의 트렌드라니?」중에서
요즘 애들은 진득하지 못하다는 말은 분명히 맞다. 젊은 시절 입사해서 수십 년을 근속한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은 이제 천연기념물이 될 것이다. 물론 아버지라고 직장 생활이 즐거워서 수십 년을 일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는 ‘3가지 인생 중대사’를 다 이뤘다면, 그 뒤부터는 가진 것을 지키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이었다. “이건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야”라며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은 이기적이거나 철이 없다며 손가락질 받던 그때, 다들 그랬듯 아버지도 주어진 일에 열심히 임하는 삶을 살아오신 것이다. 그런 당연했던 것들이 우리에겐 더 이상 없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는 것도, 한번 들어간 직장에서 열심히 버텨서 승진해야 하는 것도 모두 ‘당연하지 않게’ 됐다. 당연함을 잃은 대신, 우리는 선택권을 얻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매 순간 기로에 놓이고 모든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어차피 모든 게 내 선택의 결과라면, 내가 더 원하는 것을 택하는 편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나중에 덜 후회할 것을, 지금이니까 할 수 있는 것을 택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 아니라 반대로 용기 있는 일이 된 것이다.
---「‘남들 하는 대로’가 아닌 ‘내가 원하는 대로’」중에서
10대들은 메타버스에 (과장해서 말하면) 상주하고, 20대들은 필요할 때만 들어가며, 30대들은 돈과 관련이 있는지만 신경 쓰면서 대체로 관망할 뿐이다. MZ들의 메타버스는 절대 한 덩어리가 아니다. 만일 청년층을 대상으로 선거 유세를 하려 제페토에 접속한다면, 그곳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대부분 유권자가 아닌 10대거나 혹은 자녀 때문에 덩달아 접속한 30~40대 부모들일 가능성이 크다. 메타버스 마케팅은 생각보다 훨씬 더 세밀한 마이크로 타깃팅이 필요한 분야다. 학교와 기업의 높으신 분들은 이를 간과한 채 ‘요즘 애들론’을 펼치며 모든 것의 메타버스화化에 급급한 모습을 보인다. (…) 우린 신기술이라면 무조건 환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요새 MZ세대에게 어필하려면 메타버스 해야 한다며?” 같은 오해는 하지 말자. 왜 메타버스인지, 무엇을 담을 것인지, 정확히 누구를 타깃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이어가는 ‘메타버스 타령’은 그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마케팅에 불과할 뿐이니까.
---「‘메타버스’라는 알다가도 모를 버스」중에서
나이가 얼마나 많든 상관없이 내게 진심 어린 “왜”를 건네주는 사람에게 나는 마음을 깊이 열었다.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고, 그 노력이 눈에 보였다. 아마 건방진 표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꼰대가 되지 않으려는 노력, 무언가를 내게 말해 주고 싶을 때 혹여 내가 불쾌해하거나 상처받지 않게끔 하기 위해 들이는 그 노력이 “미안, 나도 벌써 나이 들고 꼰대가 돼 버려서 어쩔 수가 없어”라는 무관심한 태도보다 훨씬 치열하고 젊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어쩌면 후배들에게 “방금 그 말씀은 좀 꼰대 같았어요” “그런 조언은 자칫하면 오해받을 수 있어요” 같은 ‘역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선배가 된다는 것 자체가 축복받은 일이 아닐까. 마음도 조금 아프고 때로는 몹시 피곤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그런 대화는 오직 서로를 ‘소통할 수 있는 상대’로서 존중할 때만 오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 벌써 꼰대인가 봐”라는 포기 선언」중에서
혐오를 표현하는 건 나와 그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는 대신 더 적극적으로 벌리는 것이다. 이해는 힘들고 포기는 쉽다. 괴로운 일이 닥치면 이해하고 넘어서려고 하기보다 책임 소재를 가리고 새로 혐오할 대상을 찾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이 넘쳐난다. 가까이에서 눈동자를 마주하며 욕하는 것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돌을 던지는 것이 훨씬 쉽다. 구체적인 이름과 얼굴을 가진 현실의 상대방을 혐오하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온라인에서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익명의 집단을 혐오하는 데에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다. 거리를 벌릴수록 혐오의 수위는 더 높아지는데도, 아무 죄책감 없이 “혐오를 자제할 의향이 없다”는 우리 또래들을 나는 정말로 걱정한다.
---「너무나 쉽고 간단해진 혐오」중에서
부러지는 줄도 모르는 새 부러지는 뼈처럼, 뜨거운 줄도 모르는 새 입는 저온 화상처럼, 많은 젊은이가 헬조선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대신,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다치고 있다. 자각 증상도 없이 장시간에 걸쳐 입은 부상은, 때로는 한순간에 당한 부상보다 훨씬 치료하기 까다롭다. “우리 땐 정말 힘들었다” “지금은 좋아진 건 줄 알아라”라는 말보다는 “우리 때도 힘들었지만, 지금도 힘들겠구나. 너희도 우리도 괜찮아지도록 노력하자” 정도가 참 적당해 보인다. 지금 우리가 힘을 쏟아야 할 곳은 세대 간의 고통 경쟁이 아니라, 이 모든 고통을 함께 줄여 나가기 위한 노력이니까 말이다.
---「저온 화상과 피로 골절」중에서
누군가는 “그냥 SNS 안 하면 되지, 왜 요즘 애들은 자꾸 남들이랑 비교하면서 불행해하고 난리야?”라며 한심해한다. 하지만 내면의 단단함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외부로 향하는 창마저 닫아 버리는 일은 오히려 단절과 고립을 뜻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 물론 지금 자기 모습이 망가졌을수록 똑바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벅찬 일이다. 때로는 괴롭고, 때로는 지는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 두려운 길을 함께 걸어갈 동료가 있다면 버거움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병원을 찾는 10대, 20대, 30대 우울증 환자가 해마다 껑충껑충 늘어나는 이유는 물론 실제로 마음이 힘든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고민만 하며 앓는 이들에게 “병원을 찾으면 큰 힘이 될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고 한번 가 봐”라며 용기를 주는 사람들 또한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복잡다단한 고통, 복잡다단한 극복」중에서
만일 우리의 언어와 생각에서 ‘답게’를 조금만 덜어 내 본다면 어떨까. 한 명의 개인을 어떤 ‘나이’의 사람이나 어떤 ‘세대’의 일원으로 규정하고 짐작하기보다 ‘그냥 한 사람’으로 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MZ세대에게 “MZ라서 역시……”라고 말을 시작하기보다는, “20대 젊은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이라는 한 명의 사람으로, 그냥 그렇게 봐 주면 안 될까? 한 사람을 ‘마음대로 추측’하고 ‘빠르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오히려 그만큼 그 사람과 더 멀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 앞에 있는 한 명의 MZ는 아마 당신이 알고 있는 누군가와 비슷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 누구와도 다른 사람일 것이다. ‘요즘 젊은 애들은 그렇다’는 색안경과 ‘요즘 젊은 애들답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차츰차츰 알아 가 주었으면 좋겠다. 무언가를 좋아하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무언가에 열정을 가진, 한 명의 특별하고 젊은 사람의 세계를.
---「“?답다”가 지배하지 않는 곳」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