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이 아를 놔 두고 나가자마자 사촌동생이 이렇게 고해바쳤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나도 울음이 복받쳤다. 처음엔 참아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못 참겠어서 할 수 없이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오늘 한꺼번에 울기 위해 독한 년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그렇게 모질게 참아 냄 것일까. 보가 터진것처럼 마침내 돌파구를 찾은 울음은 온종일 울어도 울어도 그칠 수가 없었다. 사춘기의 사촌 동생은 시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알고 싶어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소리조차 말이 되어 나올 틈을 주지않고 격렬하고 난폭한 통곡이 온몸을 흔들었다.
--- p.306
스무 살의 처녀가 6.25전쟁의 중심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을 진실되게 기록한 글이다. 박완서는 40여년동안 기억 속에서 곱씹고 있던 그 과거를 탁월한 기억력과 용기있는 솔직함으로 기록하였다.
이 작품은 그녀의 연작 소설 2부에 해당한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후에 나온 작품이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이다.
322p 작품해설에서 발췌.
사람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것인지....허사장과 티나김도 양키들이 어수룩할 때 큰 이권을 두 건씩이나 따낸걸 감지덕지해 하는게 아니라 그들이 조금이라도 덜 약아졌을 때 더 계약을 따낼만한 컨세션은 없을까해서 머리를 짜고 있었다. 들어설 만한 것은 이미 다 들어섰고, 양키들 눈에 들 새로운게 있을 것 같지 않게 한국물산이 빈약한 전시라 초상화부처럼 공전을 뜯어먹을수 있는 매장을 이것저것 연구중이었다 구두닦기와 수선을 겸한 구둣방, 꽃신, 복건, 염낭등 민속적인 아동용품의 주문판매등이 그들이 같이 짜낸 묘안이었지만, 캐넌은 둘 다 탐탁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 p.231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소리 없이 들어왔을까. 창호지문은 새색시 새벽 문안만큼이나 조신하게 열렸지만 나타난 것은 마부 신씨를 비롯한 그 삼총사들이었다. 거의 경망을 떨어 본 적이 없는 올케도 양은 쟁반 위로 쨍그렁 핀셋을 떨구면서 사색이 됐다. 쟁반 위에는 신씨가 구해다 준 결핵약도 주둥이에다 약솜을 틀어막고 꽉 찬채로 놓여 있었다.
--- p.73
내가 살아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 흔한 개인사에 속할 것이나, 펼쳐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고, 현재의 잘 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펼쳐 보인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이 태평성세를 향하여 안타깝게 환기시키려다가도 변화의 속도가 하도 눈부시고 망각의 힘은 막강하여, 정말로 그런 모진 세월이 있었을까, 문득문득 내 기억력이 의심스러워 지면서, 이런 일의 부질없음에 마음이 지려 오곤 했던 것도 쓰는 동안에 힘들었던 일 중의 하나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그들을 먹여 살리니까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나의 권리 행사인 동시에 내 덕에 먹고 사는 사람을 그 정도는 단속해야 하는 의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든지 이곳에 적응해 보려는 내 나름의 노력이고, 그래봤댔자 잘 안되는 거부감의 표현이라는 걸 나만이 알고 있었다. 파자마부에서 초상화부로 쫓겨나면서 어쩔 줄 몰라 나도 모르게 시작한, 연필끝으로 종이를 뽕뽕 뚫어서 가루를 만드는 손버릇을 아직도 못 고치고 있었다.
--- p.261
'겨울나무' - 그들은 마치 돈이 돈을 부르는 영험을 믿는 것처럼, 사십만 원을 세고 더 세면서 더 많은 돈을 벌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런식으로 좋아 하리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나는 두 무릎을 세운 사이로 고개를 묻고 엎드려서 피곤한 시늉을 했다. 그만, 제발 그만 좋아해. 그렇게 악을 쓰고 싶은 걸 어금니 사이에서 죽자꾸나 억누르고.
'에필로그' -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통과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 p.230,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