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똘똘이, 한현이가 부를 땐 쫄쫄이
개가 음식을 양보하는 것은 모든 것을 양보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좌우명과 자유롭게 살려면 함께 사는 인간 앞에서 뭔가를 잘하는 척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는 믿음대로 살아간다. 엄마와의 추억, 매일매일 하는 산책, 날개처럼 큰 귀를 가진 갈래머리네 개 쫄랑이와 뭔가를 시킬 땐 먹을 걸로 유혹하는 양심 있는 인간을 좋아한다. 싫어하는 것은 개는 장이 약해서 우유 먹으면 설사해라는 말. 취미는 인간을 관찰하는 것으로, 왜 어른 여자는 꼬맹이를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지, 꼬맹이는 갈래머리 여자애한테 맞으면서도 왜 즐거워하는지, 사람들은 왜 시계라는 물건의 눈치를 보며 사는지, 개가 혀로 하는 일들을 꼬맹이가 손으로 하는 느낌은 어떤 건지 늘 궁금해한다.
내 이름은 한현이, 쫄쫄이가 부를 땐 꼬맹이
좋아하는 것은 갈래머리 예지, 가끔 핑계를 대고 거르긴 하지만 쫄쫄이와 함께하는 산책이다. 싫어하는 것은 예지가 민종이한테 잘해 주는 것, 선생님이 ‘만약 너희가’란 무기를 앞세워 자주 악담을 하는 것, 그리고 쫄쫄이를 밥만 축내는 똥개, 산만한 똥개, 멍청한 똥개라며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하지만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일어날 줄 모르는 누나의 이기적인 엉덩이만큼 자주 부딪치는 것은 없다. 누나를 부를 땐 꼬박꼬박 ‘우리 딸’로 부르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겐 쫄쫄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구박하는 아빠, 여자애들이 키 크고 능력 좋은 애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니 네 능력과 키를 키우라는 엄마의 말에서 인생의 쓴맛을 느낀다.
쫄쫄이 에피소드 #1
갈래머리와 꼬맹이는 주인과 노예 같았다. 아니, 더 심했다. 꼬맹이는 뭐든 하라는 대로 하고, 맞으면서도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갈래머리는 꼬맹이가 개그맨 흉내 내는 걸 보면서 신 나게 웃다가도 조금이라도 놀리면 째려보고, 발로 차고, 꼬집었다. 한쪽은 재미로 하는 건데 한쪽은 철저한 보복을 하는 것이다. 그들의 문제는 나에게도 문제가 되었다. 푸들이 은근히 나를 막 대하는 거다. 나는 예의상 꼬리를 흔들었을 뿐인데 관심 없다는 듯 목을 빳빳하게 들고는 몸을 획 돌려 버렸다.
나는 혼자 땅을 팠다. 개들이라면 누구나 땅 파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발에 흙 묻히는 걸 좋아하고, 땅 밑에 뭐가 있는지 관심이 많다. 예전에는 운 좋게 발견한 음식을 땅속에 숨겨 놓곤 했다. 배고플 때 먹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푸들은 원시 개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설마 땅에 떨어진 걸 먹으려고? 그렇게 비위생적인 습관을 가졌다간 장염에 걸릴 수 있다고.”
흙이 더럽다는 얘기는 처음 들어 본 것이었고 나는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
“모든 것이 땅에서 생겨나고 땅에서 사는데 흙이 왜 더럽다는 거야?”
쫄쫄이 에피소드 #2
컵을 엎지르자 노란색 물이 꼬맹이의 바지와 이불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컵을 침대 밑에 숨겨 두고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꼬맹이는 뭔가를 깨달은 듯 눈을 번쩍 뜨더니 경련을 일으키며 일어났다. 이불과 바지를 만져 보고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확인했다. 자다가 그 부위가 젖을 이유는 오줌 말고 뭐가 있겠는가. 꼬맹이는 얼른 팬티와 바지를 갈아입고는 드라이어를 가져다 이불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어머나, 너 뭔 일 있니? 혼자 일어난 것도 이상한데 이불 정리라니. 그 드라이어는 또 뭐야……. 너 혹시 오줌 쌌니?”
그러게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면 의심을 사는 법이지. 꼬맹이는 태연하게 내 엉덩이를 톡톡 때리며 말했다.
“쫄쫄아, 내 이불에다 오줌을 싸면 어떡하니?”
어른 여자가 나를 쳐다봤다. ‘정말 니 오줌이니?’ 묻는 것이다. 자존심 있는 개란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어른 여자 앞에다 떳떳이 오줌을 싸서 저것은 절대 내 오줌이 아니란 것을 밝혔다. 또 두 번에 나눠 쌌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특별히 많은 양을 쌌다. 그러고는 어른 여자에게 엉덩이를 내밀었다. 어른 여자는 내가 집 안 정해지지 않은 곳에 오줌을 쌀 때마다 내 엉덩이를 치고는 베란다로 쫓아냈기 때문이다.
어른 여자는 꼬맹이를 신경 쓰느라 내 엉덩이는 대충 치고 넘어갔다.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베란다로 나갔다.
한현이 에피소드 #1
나는 확실한 예감에 사로잡혀 쫄쫄이 집으로 가 보았다. 쫄쫄이는 복권 한 장은 모조리 씹어 먹고, 나머지는 맛만 보고 뱉은 것 같았다. 남은 부분도 좀 축축한 상태였지만 잘 다림질하면 비슷하게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주머니에 넣고는 아무것도 못 찾은 듯 아빠한테 돌아왔다. 만약 이 사실을 들킨다면 나와 쫄쫄이의 미래는 불투명해진다. 아빠가 물었다.
“쫄쫄이가 먹어 버린 것 같진 않아?”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저녁 먹고 곯아떨어져 있던데요…….”
나는 목소리가 떨릴까 봐 조심조심 힘주어 대답했다. 아빠는 엄마를 추궁하는 눈으로 말했다.
“하기야 사람이면 몰라도 개가 훔쳐 갈 리 없지.”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번호를 확인했다. 11번, 17번, 26번은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으나 나머지 번호들은 22번 같기도, 34번 같기도 한 채로 침에 번져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나마 46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복권이 보이지 않도록 작게 구겨 침대 밑에 던져 놓았다. 누구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복권은 나의 스마트폰과 비싼 운동화를 품은 채 거기에 놓여 있다.
며칠 후, 엄마는 홈쇼핑으로 양문형 냉장고를 장만했다. 아빠는 복권 당첨금으로 냉장고를 산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나한테 운동화라도 하나 사 줬어야 했는데 냉장고로 돈이 다 나간 것 같다며 미안하다고도 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