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언젠가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의 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삼월의 찬 바람을 견디던 분홍색 벚꽃잎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교토의 나, 이층버스에 매달려 한여름의 하이드파크를 향해 ‘굿바이’라고 읊조리던 나, 험악한 인상의 공항경찰 앞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던 두바이의 나, 해협을 건너 아마쿠사로 가던 배에서 갑자기 나타난 돌고래 떼에 시선을 빼앗겼던 나. 그때마다 기억 속의 나는 내게 참 낯선 사람이었다. 그 낯선 사람을 생각하며 떠올린, ‘언젠가, 아마도’라는 말로 시작될 여행의 짧은 이야기들을 이 책에 수록했다. (…중략…) 언젠가 아마도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낯선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낯선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할 것이다. 언젠가,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리라는 것. 그게 나의 여행이라는 것. 그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작가의 말」중에서
내가 아는 한, 한국에서 가장 완벽하게 잠적하는 방법은 인천공항에서 더반까지 비행기를 타고 간 뒤, 다시 자동차로 앰피시어터 백패커스 로지로 가는 일이다. 거기에는 맥주 마시기 좋은 바가 있으니까 사흘 정도 지내면서 곰곰이 생각해본 뒤에 그래도 정 잠적하고 싶다면, 드라켄즈버그산맥을 넘어 레소토로 입국한다. 도중에 사니 패스의 정상에서 맥주 1잔을 마시는 걸 빼먹지 마라. 그 이후의 맥주에 대해서는 책임질 수 없으니까.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는 방법」중에서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 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 알게 됐으니까. 이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친구처럼 지낸 이들과도, 또 아꼈으나 잃어버린 물건과도 아무런 미련 없이. 이젠 알겠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삶의 원리를 배웠다는 사실을. 그레이트! 베리 굿! 다만 그뿐이라는 것. 떠나는 순간에 아쉬움이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중에서
여행하는 내내 나는 그 많은 호텔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건 마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질문처럼 느껴졌다. 심각하고 복잡해진다면, 정답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많은 호텔 비누는 제대로 씻지 못해 질병에 시달리는 제3세계 아이에게 간다. 정말이지 이건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멋진 정답이다. 비누는 계속 청결의 상징이 되어야겠다. ---「그 많은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중에서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단. 독. 여행」중에서
그건 아마도 모든 인간의 소망과 꿈은 서로 닮았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 소망과 꿈의 운명도 대개는 비슷하다. 멀리서 바라볼 때 라스베이거스가 신기루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까닭은, 결국 대개는 패배할 운명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소망하고 다시 꿈꾸는 일이 바로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리라. ---「꿈꾸고 소망하는 일, 사람의 일」중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뒤, 그 사고가 수학여행 때문에 벌어지기라도 한 양 모든 수학여행이 취소됐다. 대체 수학여행이 무슨 잘못일까. 낡은 배가 기울 정도로 화물을 실은 게 침몰의 원인이라면 그렇게 한 선사가 문제지. 또 그렇다 한들, 폭격으로 순식간에 침몰한 것도 아닌데, 인명을 구조하라고 만든 국가기관이 승객을 구하면 되지 않았나. 여하튼 수학여행은 무죄니, 선사와 국가가 책임지기를. 누가 뭐래도 수학여행은 꼭 필요한 것이니까. ---「수학여행은 무죄다」중에서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비록 나는 안중근의 손가락은 찾지 못했지만, 그의 여정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안중근의 손가락이 내게 들려준 말」중에서
대개의 경우 내게 독서는 12시간 동안의 비행과 같은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는 좋은 취미생활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들이 있는 게 아닐까? 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이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이코노미석에 앉아 조종사의 눈으로」중에서
그 기분이 최고조에 달할 때는 멀리서 터널이 보일 때다. 차의 가속페달을 밟아 옛 기차 터널 속으로 들어가니 블랙홀을 향해 돌진하는 우주선 선장이 된 듯한 기분이다. 반대편 멀리 터널의 끝이 보인다. ‘난 아마 다른 평행 우주로 튕겨 나올 거야.’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터널의 끝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그러니까 그 터널을 지나가려는 또 다른 자동차다. 역시 이 우주라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또 이 우주라니 아쉽기도 하다. ---「터널을 빠져나와도 다시 이 우주라니」중에서
그럼에도 몇 번의 달리기는 성공적이었다. 지난여름, 일본 미나미아소에서 아소산을 바라보면서 달린 길은 너무나 평화로워서 인상적이었다. 누군가 내 모습을 찍었다면, 그대로 [러너스 월드]에 보내도 좋을 만큼 풍경이 아름다웠다.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샌프란시스코만을 바라보면서 달린 일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이어폰에서 리 오스카의 ‘San Francisco Bay’가 흘러나왔는데, 그 순간 나는 그 노래를 완전히 이해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치로운 달리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