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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태, 그리며 살았다
중고도서

최종태, 그리며 살았다

: 한 예술가의 자유를 만나기까지의 여정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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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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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20년 01월 08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468g | 135*215*20mm
ISBN13 9788934999928
ISBN10 8934999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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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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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분명히 있기는 있지만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것이 자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자유를 얻으면 아름다움에도 그만큼 더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美보다도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훌륭한 것’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훌륭함 속에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예술이 예술의 경지를 벗어나면 예술이 아니겠지만, 그러면 어떻습니까. --- p.25

깜깜한 터널이 있었다. 그 터널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어둠일 뿐이었다. 그 어둠 안으로 어디서인지 모르게 신호가 있었다. 그것은 ‘기쁨의 씨’ 같은 것이었다. 실낱같은 빛이 가슴 안쪽 벽을 두들기는 것이었다. 촉감으로 그것이 느껴졌다. --- p.30

나이 들어 예술 하는 일이 어린이 놀이 하듯 즐거우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목적성으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큰 예술가들이 모두가 어린이와 같이 돼야 한다고 했나 보다. 어린이가 어른이 됐다가 다시 어린이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이치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인 것만은 분명하다. --- p.32-33

깨끗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좋은 그림은 타고나야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깨끗한 그림은 노력하면 될 일이 아닐까. 늦은 가을 외딴 산자락에 하얗게 핀 구절초. 누가 보거나 말거나 시간이 가거나 말거나 아랑곳함이 없이 그냥 피어 있다. ... 그림 그리는 일은 어제 묻은 때를 지우는 일이다. --- p.40

수수만만의 걸품傑品들이 세계의 미술사를 장식하고 있다. 어디 하나 제쳐놓고 지나칠 수 없는 진귀한 작품들이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것이다. 문제는 하나하나가 특수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 에너지가 나를 잡아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무수한 별들의 에너지를 소화해서 삭히기 전에는 내가 그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다. 어떻게 자유를 얻을 것인가. 끝도 없는 번뇌의 밤이 있었다. 온갖 요괴와 함정들이 있는 광활한 평원을 혼자서 걷는 것 같았다. 어디로부터도 위로 받을 곳이 없었다. 쉬어서 잠자고 할 언덕이 없는 끝없는 벌판. 그런 밤이었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을 수용하되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 p.42

잡초도 꽃이 핀다. 잡초는 잡초대로 화초는 화초대로이다. 텃밭에 잡초가 솟아났는데 실 같은 대롱에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 저걸 화초가 아니라고 나는 뽑아낼 수가 없었다. 아름다움에 어찌 상하가 있을까. 생명에 어찌 귀천이 있을까. --- p.43

릴케의 시를 빌려서 내가 기도한다. 뜨거운 햇빛을 쏟아주셔서 익지 못한 가슴에 단물이 차게 하여주시고, 그런 천금의 시간을 하루만 더 내게 허락하여주소서. --- p.44

근래 화제가 된 이야기에 자코메티가 피카소를 뛰어넘었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 간 사람하고 뒤로 간 사람의 마주침 같은 것이다. ... 예술가는 자기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삶을 마칠 수 있어야 한다. 나비도 집이 있고 개미도 집이 있다. 영원의 길목에다가 무너지지 않을 집을 지어야 한다. 허물었다 도로 쌓고 나는 매일 같이 집 짓는 일을 하고 있다. 내일이면 그럴 만한 집이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 p.45-46

삶 전체가 가식 없이 화면 위에 쏟아져 나왔다. 흰색 안에는 또 다른 흰색이 있고 검정 안에는 이름할 수 없는 무수한 검정들이 살아 있었다. 유유히 큰 세월을 흐르는 한강과도 같은 도도한 양감이 거기에 있었다.
윤 선생 그림은 광활한 벌판 같다. 사람과 그림은 서로 닮는다. 윤 선생의 경우처럼 그렇게 빼닮는 수가 또 있을까. 윤 선생의 그림을 볼라치면 그 뒤에 사람이 보여서 놀라는 경우가 있었다. 윤형근 선생의 그림이 사람을 자꾸만 닮아갔다. 그러다가 사람을 떠나서 영원의 품으로 들어갔다. 그림이 사람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 그 흑빛의 추상적 형태는 불의에 항거하는 번뜩임으로 마른하늘에 무지개를 그린다. --- p.85-86

인체를 다루는 조각가들은 있었지만 인간을 만들려고 했던 조각가는 자코메티 한 사람뿐이었다. 형태들은 부동不動의 자세를 하고 있다. 동작이 생기면 어떤 순간에 고착된 형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코메티는 부동 속에 무한한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가 나중에 걸어가는 사람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광장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생명의 축제 현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의 〈걸어가는 사람〉은 오늘도 쉬지 않고 이 역사의 현장을 걸어가고 있다. --- p.90-91

아름다움은 영원과 한 몸인 것을 나는 믿고 싶습니다. 영원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그림이란 것이 사랑을 분모로 하고 있어야 합니다. --- p.116

불교미술사에서 보면 관음상은 여성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만일 관음이 남자였으면 안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평생 소녀상만 만든 사람이다.
관음상을 만들 때를 생각해보는데 이상한 점이 하나가 있다. 일하면서 도무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p.170

그런 노래가 없었더라면 그 삭막한 시대를 어떻게 살 뻔했던가. 삼천리 전쟁 속에는 노래가 있었다. 음악이라는 단어는 너무 고급스러워서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노래였다. --- p.182

아름다움의 끝자리는 성스러움의 곳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합니다. 성스러운 곳은 어디인가. 이론으로 안다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삶이 거기에 당도해야 될 일이기 때문입니다. --- p.230

선생님이 그때 그게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셨다. 네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한 말씀은 내게 일생의 큰 지표가 되었다. 나의 진실을 말한다 하는 다짐이었다. 다시는 속에 없는 말을 쓰지 않으리라. --- p.248

나는 젊은 날부터 좋은 사람이 좋은 그림을 그린다 생각하고 일생 동안 그렇게 믿었다. 옛날에 위대한 예술을 만든 이들은 모두가 훌륭한 사람들이었으리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 p.252

오늘은 될까, 또 오늘은 될까 하면서 항상 내일에 기대를 걸고 살아왔다.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인고忍苦의 날들을 지새웠다. 나의 그 포기할 수 없었던 시간들을 한 줄로 세운다면 몇 만 리가 될지. --- p.260

내 맘대로 그린다. 틀렸대도 할 수 없다. 어제 간 길을 오늘 다시 밟지 않는다. 아직 발 디디지 않은 땅에서 보물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임자이다. 모든 풀들은 온전하고 아름답다. 모든 나무들은 온전하고 아름답다. 모든 꽃들은 온전하고 다 아름답다. 덜 됨이 없고 속이 가득 차 있다. 나는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는 일이 시행의 착오였다. 정확한 내 선을 긋기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크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 p.267

그 한 찰나에 마침내 내가 해방된 것이다. 일체의 경계가 일시에 허물어졌다. 세상이 밝아진 것 같다. 모든 개체는 혼자로서 온전하고 모든 개체들은 다 합쳐져서 온전한 또 다른 하나를 이룬다. 한 폭의 그림이 그러한 것처럼. 이제 나는 외롭지 않다. 산천초목이 다 형제이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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