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우는 모습은 처음 봐요.” 흐느껴 울고 있던 그는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해질녘 초라한 성당 가운데 오도카니 선 낯선 소녀의 모습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물 맺힌 눈동자 속으로 스며든 정돈되지 않은 소녀의 모습이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소녀의 흑석처럼 까만 눈동자가 환하게 웃었다. 순간 그는 명치끝이 저려오는 아픔을 느끼며 자신의 눈가에 남아있는 몇 방울의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나도 여기 울려고 왔는데 뜻밖의 동지를 만나 반가운데요. 내 존재가 아저씨에겐 방해꾼으로만 보이겠지만요.” “난 이 곳이 처음이야.” “난 아주 가끔 와요. 별로 오고 싶진 않은 곳인데 어머니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오게 되네요. 어머니가 병원으로 끌려가기 전에 항상 하시는 당부가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해 달라는 것이거든요. 와서 기도보다는 욕을 더 많이 하지만 그래도 와야 할 것 같아서요.” “어머니가 큰 병을 얻으셨나 보구나.” “우리 어머니는 마음의 병이 들었어요. 그치만 난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아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쭈욱 그래왔으니까…….” “그 사실이 슬프진 않니?” “아뇨. 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그 자체만이 슬플 뿐인걸요.” 소녀의 검은 눈빛에 슬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조금 전까지 열네댓 살 된 어린 아이로만 보이던 소녀의 모습에서 언뜻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넌 몇 살이지?” “열여덟.” “어쩌지? 난 더 어리게 봤는데……. 초면인데 반말을 해서 미안하다.” “아뇨. 난 그게 더 좋은걸요. 친근감 있고……. 아저씬 몇 살이에요?” “스물 둘.” “금 나랑 네 살 차이밖에 안 나네.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가 소녀의 스스럼없는 말투에 미소 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는 왜 처음 온 성당에서 울고 있었어요? 혹시 시련이라도 당하셨나?” “아니. 부모님이 돌아 가신지 일 년째 되는 날이거든. 일종의 추모식을 하러 왔어.” “그래도 오빤 행복한 사람이네요. 오빠를 사랑해준 부모님이 계셨으니까……. 그분들 아직도 저 하늘 어딘가에서 오빠를 바라보고 계시겠죠?” “그렇겠지. 천국이 있다면…….” 천국이란 말에 소녀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성당 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혀 흘러내렸다. 그가 소녀에게로 다가가 눈물을 닦아주었다. 마치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 듯 자연스럽게…….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나 봐. 미안하다.” 소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사람들이 말하는 천국을 믿지 않아요. 그런 곳이 있더라도 난 갈 수 없을 테니까.” “누구에게나 천국은 있어. 각자가 지니고 있는 희망이나 꿈, 사랑 같은 것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천국 아닐까?” “그럼 오빠가 나의 천국이 되어 줄래요? 내가 힘들 때, 내가 외로울 때, 날 지켜줄 수 있는 천국이 되어주세요.” 살아있는 천국.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지만 슬픔으로 빛나던 소녀의 눈빛에 환한 미소가 어리자 그는 소녀의 미소를 볼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녀의 천국뿐만 아니라 지옥도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는 소녀의 미소에 끌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소녀가 그를 향해 하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난 혜인이라고 해요. 나․혜․인. 나 씨는 참 건방진 성이죠? 우리 어머니의 성이기도 해요. 그럼 나혜인의 천국님은 이름이 뭐죠?” “이민영.” 민영은 긴 자신의 손가락을 혜인의 손가락에 걸며, 어머니의 성을 가진 어린 소녀에게 운명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