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악!” 소리를 꽥지르며 아침과 같은 동작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진 지혜는 아픔에 눈물을 찔끔거리며 웅크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뭐야? 또 너냐? 내가 아까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그런 경고가 너에겐 아무 소용이 없었나보군.” 학습능력이 부족한 저능아를 상대하는 듯한 남자의 말에 지혜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마와 엉덩이를 찌르는 아픔마저도 그 순간엔 그녀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릴 정도였다. 눈에 불을 켜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던 남자가 뜬금 없이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사내자식이 이렇게 가벼워서 어디 쓰냐? 이렇게 비리비리 해서는 여자들한테 인기 못 얻어.” 그의 등뒤에서 사건의 전모를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던 그녀의 선배이자 동아리 회장인 동아를 향해 돌아서며 동의를 구하는 그의 말에 지혜의 입에서 컥하며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그녀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동아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친구를 향해 말했다. “임마, 저녀석 여자야.” 동아의 말에 지혁의 얼굴에서 웃음이 걷혔다. 굳어진 그의 손을 매섭게 뿌리친 지혜는 한껏 거만한 포즈로 그의 사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믿을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의 말이었다. “얘가 여자라고? 말이 되는 소릴 좀 해라. 척 봐도 통나무 같은 몸매에 섬머슴처럼 생긴 녀석이 여자라니, 공갈도 그런 공갈이 어딨냐? 아무렴 내가 여자도 못 알아볼까. 너, 아무리 오랜만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농담은 전혀 재미없다.” 지혁이 간간이 참지 못한 웃음을 흘리며 동아의 어깨를 장난스레 툭 쳤다. 그런 그의 행동에 동아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지혜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활화산처럼 검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든 상황을 무마하고자 동아가 억지 웃음을 베어 물며 지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임마, 넌 속고만 살았냐? 내가 왜 거짓말을 해?” “그럼 저 꼴을 어떻게 설명할건데? 명색이 여대생이 저런 옷차림이 말이 되냐?”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 내리는 그의 시선에 비친 모습은 결코 20대 초반의 한창 꾸미고 다닐 여성의 모습이 아닌, 키만 껑충 큰 18~19살 정도의 남학생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을 벙거지 모자가 가리고 있었지만 제법 곱상한 면상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모자 안에 밀어 넣은 머리카락은 길이를 가늠키 어려웠고, 펑퍼짐한 힙합 바지에 자기 발보다 더 커 보이는 워커를 신고있는 대략 175센티 정도는 되어 보이는 녀석을 어느 누가 여자라고 보겠는가. “사실 그 말에 부정은 못하겠다만, 너 기억 안나? 동아리에 직속후배가 한 명 있는데, 좀 특이한 아니, 귀여운 녀석이 있다고.” 특이란 단어에 지혜가 입가를 실룩이자 재빨리 말을 고친 동아였다. “그때 말한 녀석이 이녀석이야. 앞으로 너랑 같은 수업들을 거니까 지금 점수 깎이지 말고 잘 보여둬라. 흠흠, 이미 늦은 것 같긴 하다만.” 동아의 말에 지혁이 그래도 미심쩍은지 다시금 지혜의 전신을 훑었다. 지혜는 지금도 아려오는 통증을 제쳐두더라도 그를 용서해줄까 말깐데, 자신의 성별까지 의심하는 지혁의 괘씸한 태도에 이를 갈았다. “뭐야, 그럼 발육부진이잖아.” 중얼거리듯 내뱉은 그의 말 한마디가 그녀의 이성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사랑이 지나가는 길’ 외 ‘넌 내꺼야!’ 라는 단편도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늘에 박혀있던 이 글을 다시금 꺼내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몇 년만에 다시 글을 쓰는 동안 수없이 좌절하던 나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친구들. 많이 부족한 글이지만 이 글로 친구들의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