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쯧쯧, 성미가 급하군. 순순히 말하는 것이 좋을 터인데? 안 그러면 네가 아닌 저 뒤의 계집들이 죽을 테니까.”
새빨갛던 소년의 얼굴이 이번에는 새하얗게 질렸다. 눈앞의 소년이 저 여인들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했다가 봉변을 당했을 거라는 자신의 추측이 들어맞자 단의 미소는 더욱 깊어졌다.
“자, 이제 어쩔 거냐?”
“이, 이 나쁜 놈!”
뽀도독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마저도 경쾌하게 들려왔다. 단의 입가에 드물게 진정한 미소가 맺혔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평생 태어나서 농 한번 걸어본 적 없는 그였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병사를 쓰러뜨린 작디작은 소년의 모습에서 기이한 정열을 느꼈고 남을 위해 자신을 내던진 소년의 용기가 참으로 기특하게 느껴졌다.
“난 인내심이 별로 없는 편이거든.”
말과 함께 그는 검을 들어 소년을 향해 가볍게 휘둘렀다. 놀란 소년이 서둘러 뒤로 물러섰지만 옷자락만은 칼날 앞에 무사하지 못했다.
찌이익!
“꺄악!”
높은 비명소리에 놀란 단은 소년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칼날이 옷을 스친 순간 앞섶이 갈라지며 그 안에 숨겨진 뽀얀 속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엇보다도 소담스럽게 부풀어 오른 가슴의 융기가 그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의 시선을 느낀 소년은 순간 화들짝 놀라 온몸이 붉어지며 옷자락을 움켜쥔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흰 피부가 순식간에 분홍빛으로 물들어버리는 것을 그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단은 소년이 품에 숨긴 암기들을 없애기 위해, 그리고 약간의 위협을 가하기 위해 검을 휘둘렀을 뿐 정말 오래간만에 만난 흥밋거리를 당장 죽이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제멋대로 흘러갔다.
“여인? 여인이란 말인가?”
소년, 아니 소녀는 더욱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앞섶이 완전히 잘려나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상황이었기에 몸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은 한동안 그 상태로 얼이 빠져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믿을 수가 없군. 한낱 여인 따위가 이런 일을 하다니…….”
처음부터 소년이 여인이란 생각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제법 곱상하니 어여쁘다는 생각을 하긴 했으나, 더구나 목소리마저 계집애 같다 생각하긴 했으나 진정 여인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다. 여인이라면, 어떻게 병사들을 상대로 그렇게 싸울 수 있단 말인가.
“죽여라! 어서 죽이란 말이다!”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악에 받쳐 소리쳤다. 말 위에 있는 단에게 흰 목덜미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이런 모욕을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어서 죽여라!”
삐이익! 삐이이이익!
혼란에 빠진 단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드러난 찰나 기이한 소리가 공기를 찢으며 그의 귀까지 전달됐다. 절대 그의 얼굴을 다시 응시할 것 같지 않던 소녀의 고개가 그 순간 번쩍 들렸다. 단은 그 순간 소녀의 얼굴에 깊은 안도감과 희열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신호인가?"
그의 물음에도 소녀는 고집스레 입을 꼭 다물 뿐이었다.
“과연 그렇군. 역시 함정이었단 말이지? 미끼를 놓고 일망타진(一網打盡)하겠다는 심보렸다?”
홀로 중얼거리면서도 그는 서둘러 말을 몰아 소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안색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 챈 소녀와 단의 시선이 얽혀든 그 순간……. 우아한 선을 그리며 몸을 숙인 남자의 억센 팔이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낚아채 감싸 올리고는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