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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5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344쪽 | 432g | 128*188*30mm
ISBN13 9788984373174
ISBN10 8984373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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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빼앗긴 지도를 처음 발견한 곳은 보스턴에 있는 작은 서점이었다. 2월의 어느 오후, 아주 춥고도 흐린 날이었다. 그 며칠 전, 나는 메인 주에 있는 신문사에 사표를 던졌다. 지난 10년 동안 신문사에 사표를 던진 게 세 번이었고, 이번이 네 번째였다. 나는 늘 공장지역의 자그마한 신문사에서 일했다. 낡은 볼보를 타고 동부해안지역을 돌며 내가 일할 신문사를 찾아 헤맨 삶이었다. 뉴욕 주의 스키넥터디, 펜실베이니아 주의 스크랜턴, 매사추세츠 주의 우스터, 메인 주의 오거스타가 내가 머물렀던 도시였다. 지역의 작은 도시에 위치한 신문사들이 내 일터가 되어 주었다. 신문사 동료들은 내가 왜 낙후된 도시에 머무는지, 10년 동안 기자생활을 한 경력이 있는데 왜 필라델피아나 보스턴,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 p.22

나는 핸들에 부딪치는 순간 갈비뼈에 타박상을 입었고, 도로에 엉덩방아를 찧는 바람에 꼬리뼈 타박상을 덧붙이게 되었다. 통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목이 부러져 아직도 코에서 피를 내뿜고 있는 캥거루 시체 옆에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어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운전석으로 비틀비틀 걸어가 손전등을 꺼내 차의 파손 상태를 살폈다. 헤드라이트 하나가 깨지고, 앞 범퍼가 살짝 찌그러지긴 했지만 그리 심각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
거대한 캥거루와 충돌한 사고치고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캥거루가 껑충 뛰어올랐다가 차에 치이는 바람에 옆으로 튕겨져 나간 듯했다. 만약 앞쪽에서 달려오는 캥거루와 정면충돌했다면 아마도 밴이 아코디언처럼 찌그러졌을 공산이 컸다.
밴의 차체 손상은 가벼웠지만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수칙을 망각해버린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어두워진 도로에서는 차를 운행하지 말 것.’
--- p.42

청바지 대신 반바지로 갈아입고 핸들 앞에 앉았다. 안전벨트 길이를 조절해 갈비뼈에 지나친 압박이 가해지지 않게 했다. 이제 출발할 준비를 모두 마쳤다. 출발하기 전, 스피니펙스 덤불밖에 없는 지평선 너머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마치 선사시대의 풍경을 보는 듯 장엄하고 두려운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시작인가? 아니면 세상의 끝인가? 아무튼 내 처지에 걸맞은 심연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변명의 여지없이 시각적으로 확인했다. 이제 더 이상 볼 게 없었다. 오지?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니 여행의 목적이 이미 실현된 게 아닌가?
--- p.48

원시적인 대자연 속에 있다 보면 사소한 근심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은 죄다 헛소리일 뿐이었다. 내 경우에는 오히려 두려움과 자기혐오가 증폭되었다.
대자연이 내게 말했다.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을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어도 되는 곳에 남아 있고 싶었다.
쿠누누라에서 아무런 목적도 없이 남아 있기도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 두려움의 원천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쿠누누라에서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니까 어서 떠나는 거야.
알았어, 사흘만 더 있다가 떠날게.
사흘 더. 샤워를 아홉 번 더.
--- p.59

조용히 은하수를 감상하기 시작한 지 몇 분쯤 지났을 때 앤지가 말했다.
“며칠 뒤에 나를 버릴 생각이지?”
“말도 안 돼.”
마음속으로 곧장 생각했다.
‘내 속이 그렇게 빤히 들여다보였나?’
앤지는 하늘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이 안 되지 않을 텐데? 당신은 분명 그럴 계획이니까.”
“그런 말은…….”
“줄곧 그럴 계획이었지?”
“내 생각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함부로 재단해?”
앤지가 나를 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짓고 나서 말했다.
“당신 얼굴에 다 나와 있으니까. 당신은 처음부터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떠날 생각이었지.”
앤지의 말에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유죄를 인정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밤하늘에서 벌어지는 별들의 축제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앤지가 한 마디 말로 나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그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개자식!”
--- p.90

저녁 6시, 하늘에 빨갛게 달군 프라이팬에 들어 있는 버터 조각 같은 태양이 떠 있었고, 울라누프 마을 일대가 온통 지글지글 타다가 녹아내린 캐러멜처럼 연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곧장 후회했다. 쓰레기 산의 악취가 콧속으로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높이 솟은 쓰레기 산이 아주 작은 울라누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인상을 쓰며 기침을 하자 거스가 말했다.
“냄새 좋지?”
“어떻게 허구한 날 이런 악취를 참아요?”
“자네도 곧 익숙해질 거야. 이주일 뒤에 쓰레기더미를 태울 거야. 일 년에 네 번 열리는 행사지. 쓰레기를 태우면서 바비큐를 해먹어.”
“쓰레기를 쌓는 대신 매립할 생각은 안 해 봤어요?”
“땅을 파는 게 너무 힘들어. 게다가 자네도 보다시피 이 마을은 빌어먹을 대자연에 둘러싸여 있으니까.”
--- p.150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하며 삶을 견딘다. 노동이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더욱 큰 목적이 있는 척한다. 결국 우리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일할 뿐이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마주하지 않기 위해 일할 뿐이다. 계속 바삐 일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절망적으로 무가치하다는 사실과 우리 스스로 빠져든 막다른 길의 깊은 수렁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에 무려 열 시간을 투자해 카브레터에 쓰이는 특별한 바늘에 신경 썼고, 베어링에 딱 필요한 만큼의 윤활유 양을 정확히 계산하는 일에 집착했다. 나는 교외 주택가에 사는 외톨이처럼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을 모두 잊기 위해 일에 매달렸다. 일을 하느라 지친 몸이 집에서 받은 통증을 효과적으로 치료해주는 진통제 역할을 해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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