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는 어쩜 그렇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고, 남편은 돈 한 푼 남기지 않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나뿐인 아들은 절연한 채 서부로 떠났다. 하나뿐인 딸은 엄마가 왜 어렵게 살면서도 조금도 도움을 바라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는 어쩜 그렇게 편안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병실 전등이 깜박여도 왜 새것으로 교체해달라고 신경질을 부리지 않았을까? 엄마는 언제나 단단하게 싸인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제나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며 슬픔을 밖으로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암센터에서 퇴원하고 이주일도 못 돼 엄마는 눈을 감았다. 나는 엄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죄스러울 뿐이었다. 나는 까다롭기 짝이 없는 새 클라이언트 때문에 압박을 받으며 일해야 했고, 남는 시간에는 에단을 돌봐야 했다. 매트에게 에단을 대신 봐달라고 부탁하는 건 정말 싫었다. 결국 하루에 세 시간씩 짬을 내 엄마의 곁을 지켰을 뿐이었다.---1권 p.35
잭 말론에 대한 첫 기억은 무엇일까? 나를 힐끗 쳐다본 것. 잭은 술잔을 들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벽에 기댄 채 어깨 너머로 연기가 자욱한 실내를 힐끗 쳐다보았다. 잭이 나중에 말하길 함께 온 친구를 찾느라 두리번거린 것이라고 했다.
문득 사람들을 스치던 잭의 눈길이 내게서 멈췄다. 그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1초, 아니 2초쯤? 잭은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잭이 미소 지었고, 나도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잭은 친구를 찾으려고 다시 고개를 다른 데로 돌렸다. 그게 전부였다. 우리의 첫 만남은 단지 서로를 힐끗 쳐다보는 것으로 끝났다.
나는 45년이 흐른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약간 지쳐보였던 푸른 눈, 뒤와 옆을 짧게 친 누런 색 머리, 광대뼈가 조금 튀어나온 갸름한 얼굴, 호리호리한 몸매에 너무나 잘 어울렸던 카키색 군복, 조용히 사색에 잠긴 듯했던 표정, 전체적으로 지독히 아일랜드계다웠던 분위기.
대개 힐끗 쳐다본다는 건 순간적으로 놓치게 되는 장면 아니던가? 무의미하게 사라져버리는 순간.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마주침 때문에 인생이 통째로 뒤바뀔 수도 있다니!
우리는 매일이다시피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전철이나 버스에서, 슈퍼마켓에서, 혹은 길을 건너다가.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행위는 순간적인 충동에 기인한다. 대개는 내 쪽으로 걸어오는 사람과 한순간 눈길이 얽히다가 스치듯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왜 딱 한 번 힐끗 쳐다본 눈길이 그토록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을까?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 단지 그렇게 됐을 뿐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1권 pp.97~98
내 몸은 갈수록 나빠졌다. 매일 2시에서 4시 사이에 잠을 깨곤 했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면 공허감이 짙어졌고, 잭 말론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일었다. 이제 내 머리에서 차가운 이성이나 명석한 판단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 생각은 늘 잭에게 가 있었다. 비이성적이고 터무니없는 감정이었다.
불면증이 계속되는 밤이면 침대에서 나와 잭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다보니 매일이다시피 쓰게 되었다. 대개는 엽서분량으로 양을 제한했지만 다섯 줄짜리 글을 여러 번 고쳐 쓰면서 한 시간 이상을 흘려보내는 일이 다반사였다. 잭에게 쓴 편지는 모두 사본을 만들어 상자에 담아두었다. 가끔은 상자를 꺼내 사랑에 번민하는 내 연애편지들을 읽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라고 내 자신을 책망했다.
몇 주일이 지나자 상황은 더욱 자명해졌다. 내가 매일이다시피 편지를 보냈는데도 잭은 단 한 통의 답장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잭이 답장을 보내지 못하는 합리적인 이유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잭이 배를 타고 유럽에 도착하려면 닷새쯤 걸릴 테고, 발령지까지 가는 데 이틀이 걸릴 테고, 그가 쓴 편지가 대서양을 건너 내게 오려면 족히 이 주일은 걸릴 거야. 크리스마스 시즌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더 걸릴지도 모르지. 전 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사가 수십만 명은 될 테니까.
크리스마스 시즌도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었다. 잭은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나는 계속 편지를 쓰면서 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1월에서 2월로 넘어갔다. 나는 매일 우편물에 집착했다. 대개는 10시 반쯤 우편물이 도착했다. 관리인이 우편물을 분류해 집집마다 갖다 주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나는 《라이프》지에서 12시 반쯤 집으로 돌아와 우편물을 챙기고, 다시 지하철역으로 달려가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 15분까지 사무실로 돌아가는 일정을 이 주일이나 반복했다. 날이면 날마다 잭의 편지가 도착했을 거라 기대했지만 나는 계속 빈손으로 사무실로 돌아가야 했다. 날이 갈수록 상실감은 깊어만 갔다. 나날이 심각해지는 불면증도 심각해졌다. ---1권 pp.170~171
“어리석은 사랑을 했어요. 딱 하룻밤을 함께 한 사람을 사랑했어요.”
“그를 사랑한 감정은 진실이었을 거예요.”
“나 혼자만의 사랑이었죠. 대상도 없는 허구의 존재와 사랑에 빠진 거예요.”
“그 분은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아마도 유럽에 있을 거예요. 군인이죠. 편지를 무수히 많이 보냈는데 지금껏 한 번도 답장을 받지 못했어요.”
“어떻게 할 생각인데요?”
“잊어야죠.”
“잊지 못한다면? 언제나 당신의 마음 한가운데 그가 있게 된다면? 당신에게 그란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닌가요?”
“정말 그렇게 되면 어쩌지 고민이 많아요.”
“처음부터 인연이 아니었다고 마음을 다독여야만 해요.”
머리와 심장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 머리는 잭 말론이 내 인생에서 열두 시간 동안 함께 하다가 떠난 걸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심장의 말은 달랐다. 심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정말 놀라웠다. 추수감사절 이전만 해도 내가 비합리적인 것들을 무시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이제는…….---1권 pp.197~198
눈을 떴을 때 곧 뭔가 아주 잘못 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밤중이었고, 옆 침대에서 조지가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은 찜통처럼 더워 몸이 푹 젖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현기증이 일며 머리가 띵했다. 가까스로 일어났지만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발을 조금씩 떼면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기운이 없는 걸 보면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한 듯했다.
손을 뻗으며 비척비척 걸어 욕실 문으로 갔다. 욕실 안으로 들어서며 전등 스위치를 켰다. 욕실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순간, 나는 욕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얼굴은 하얀 밀가루 색에 눈빛은 노랬고, 잠옷 아랫부분은 온통 시뻘건 피범벅이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다만 이번에는 쿵 소리와 함께 고꾸라졌다. 세상이 온통 까맣게 보였다.
의식을 되찾고 보니 하얀 방에 누워 있었다. 하얀 불빛이 눈부셨다.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내 눈에 펜 라이트를 비추었다. 내 왼팔은 침대에 묶여 있었다. 팔에 튜브가 꽂혀 있었고, 침대 옆에 수액이 걸려 있었다.---1권 pp.308~309
“왜 남자들은 헤어지자고 하면 다른 남자가 생긴 거라 생각하죠? 나에게 다른 사람은 없어요. 오로지 당신 때문이죠. 당신은 이제 겨우 서른다섯인데 인생을 망가뜨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살고 있어요. 더 이상 당신의 막장드라마 같은 인생에 조연을 맡고 싶지 않아요.”
“대단히 냉철한 판단이군요. 결혼에 실패한 경험 때문인가요?”
“난 냉철해야만 하니까요. 왜냐하면 냉철한 판단만이 나를 지탱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뉴욕에서 이혼녀로 살아가려면 그래야만 해요.”
7번애비뉴 34가에 있는 「뉴요커호텔」의 바에서 우리는 그런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내내 에치오 핀자의 「돈 조반니」를 들었다. 내가 소유한 음반들 중에서 자주 반복해 듣는 유일한 음악이었다.
오페라에서 도나 엘비라는 정절을 빼앗아간 돈 조반니에게 복수를 맹세한다. 정작 도나 엘비라는 자신을 버린 돈 조반니보다 바람둥이의 유혹에 맥없이 넘어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가 더욱 크다. 한편 도나 엘비라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안달하는 돈 오타비오를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오페라의 줄거리는 내 이야기와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돈 조반니에게 농락당하고, 돈 오타비오에게도 굴복했다. 이제 더는 누군가에게 농락당하거나 굴복하기 싫었다.---1권 pp.359~360
‘간략하게 말해 스위트 수사관은 당신을 당에 끌어들인 사람들과 아직도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합니다.’
스위트 수사관이 옆에서 거들었어.
‘우리에게 그런 자들의 이름을 말해준다면 당신이 공산주의 활동과는 무관하게 지내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애국심을 굳건하게 확인하는 기회가 되겠지요.’
나는 화가 나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어.
‘언제부터 무고한 사람들을 밀고하는 게 애국 행위가 됐지요?’
그러자 로스가 고함을 질렀어.
‘공산주의자들은 무고한 사람들이 아니오.’
‘제가 알고 있던 한때의 공산주의자들은 전부 무고합니다.’
그러자 스위트 수사관이 말했어.
‘아, 그러니까 스마이스 씨는 공산주의자들을 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셈이군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저처럼 과거 한 때 당에 가입했던 사람들이지요.’
버트 슈미트가 말했어.
‘에릭, 스위트 수사관에게 그런 사람들 이름을 말해주면…….’
‘그러면 제가 이름을 말한 사람들의 인생이 하루아침에 파괴되지 않을까요?’
‘당신 말대로 그들이 무고하다면 겁낼 게 없지 않겠어요?’
‘그들이 저처럼 이름을 불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법칙은 바로 그겁니다. 당신들은 저에게 이름을 대라며 겁을 주고 있어요. 제가 앞일이 두려워 두어 명의 이름을 대면 당신들은 그들에게도 저와 똑같은 게임을 벌이겠지요. 이름을 말하면 우린 아무도 건드리지 않아, 라고요. 제가 몇몇의 이름을 말하면 더는 당신들에게 추궁당하지 않겠지만 그 이후 양심을 잃은 제 자신의 처사를 어떻게 감당하며 살아갈지 암담해지는군요.’---2권 pp.77~78
경관이 우리를 데리고 ‘운구’라고 적힌 옆문을 통과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나이가 지긋한 흑인신사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경관 한 명이 몸을 숙이고 ‘스마이스’라고 말하자 노신사가 큼직한 대장을 뒤적이더니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돌렸다.
노신사가 수화기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스마이스. 58번 캐비닛.”
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잭이 재빨리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잠시 후 흰 가운을 입은 직원이 들어왔다.
“스마이스 씨의 시신을 확인하러 오셨습니까?”
경관 한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직원을 따라 좁은 복도를 걸어갔다. 대개의 정부기관들이 그렇듯 벽에는 온통 초록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고, 길쭉한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우리는 철제 문 앞에 멈춰 섰다. 직원이 문을 열었고, 우리는 정육점의 냉동실처럼 생긴 작은 방으로 들어섰다. 벽면에 숫자를 붙여놓은 스텐리스 캐비닛들이 줄을 지어 비치돼 있었다. 직원은 58번 캐비닛으로 걸어갔고, 경관 한 명이 따라가 보라는 뜻으로 나를 살짝 앞으로 밀었다. 잭이 내 옆에서 내 팔을 꽉 잡았다.
긴 침묵이 흘렀다. 경관들은 어색하게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검시소 직원이 철문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마침내 내가 심호흡을 하고 직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캐비닛이 길게 움직이며 열렸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가 잠시 후 눈을 떴다. 오빠가 내 앞에 누워 있었다. 목까지 흰 시트가 덮여 있었고, 눈은 감고 있었다. 온통 새하얀 색 피부에 입술은 파랬다. 한때 내 오빠였던 사람의 빈껍데기일 뿐이었다.
나는 흐느낌을 억누르고 다시 눈을 감았다.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영원히 내 생각 속에 머무를 사람을 이렇게 마지막으로 힐끗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에릭 스마이스 씨가 맞습니까?”
검시소 직원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2권 pp.158~159
“미안해요, 새러.”
“사과는 받아들이지 않을래요. 내게 당신과 오빠는 세상의 전부였어요. 이제 다 끝났어요.”
“난 아직 여기 당신 곁에 있어요.”
“당신은 이제 여기 없어요.”
“제발…….”
“당장 나가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
“어서 나가라니까.”
잭은 팔을 벌리고 나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당신을 사랑해요.”
“감히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말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당장 나가요!”
“난…….”
잭이 나를 끌어안으려 했고, 나는 어서 비키라며 고함을 질렀다.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잭을 때리기 시작했다. 얼굴과 머리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그는 저항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나는 마침내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다시 한 번 잭이 나를 안으려 해다. 나는 오른쪽 주먹을 그의 입을 향해 날렸다. 잭은 뒤로 물러나며 작은 테이블에 부딪쳤다. 테이블이 넘어지며 램프가 바닥에 떨어져 박살났다. 그도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내 울음소리가 갑자기 멎었다.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가 자기 입술을 어루만졌다.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잭은 비틀거리며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일 분쯤 지났을 때 잭이 손수건을 입에 대고 나왔다. 손수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려 하자 잭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길을 거부하고 부엌으로 가 물수건을 챙겼다. 냉장고에서 얼음 덩어리를 꺼내 개수통에 집어넣고 얼음 깨는 송곳으로 깼다. 그런 다음 야구공만한 얼음을 물수건에 싸서 들고 거실로 나왔다.
나는 얼음 물수건을 잭에게 내밀었다.
“이걸 상처에 대면 붓지 않을 거예요.”
잭은 물수건을 건네받아 입에 댔다.
“이제 돌아가요.”
“알았어요.”
잭이 나지막이 중얼댔다.
“내일 당신 짐을 싸놓을게요. 당신 사무실에 전화해 내가 집을 비우는 시간을 알려줄 테니 그때 와서 짐을 가져가도록 해요.”
“그건 내일 이야기해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요.”---2권 pp.205~207
느닷없이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인생의 진실을 이해해야 하리라 생각했다. 누구도 인생에 드리운 비극을 비켜갈 수는 없다는 것. 비극의 그림자는 예기치 않게 우리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것.
사람들은 비극므 두려워하며 산다. 비극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비극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디에나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비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하루하루 성벽을 쌓으며 평생을 보낸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비극의 침입을 막아낼 수는 없다. 비극은 뚜렷한 목표도 없고, 우발적이며, 무차별적이다. 비극이 밀어닥치면 사람들은 이유를 찾는다. 왜 자신이 끔찍한 비극을 겪어야만 하는지 따져본다. 비극에 담긴 신의 메시지가 뭔지 궁금해 한다.
나는 임신을 한다. 아기를 잃는다. 다시는 아기를 갖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다. 다시 임신한다. 다시 아기를 잃는다. 이처럼 반복되는 비극의 요체는 무엇일까? 신 혹은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일까? 혹은 그냥 아무런 개입 없이 저절로 벌어진 현상인가?---2권 pp.260~261
“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새삼 깨달았어. 삶이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앙이라는 사실을……. 인생이라는 이야기에는 사실 해피엔딩도 비극적인 결말도 없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간직한 사연이 있지만 해결을 보지 못하고 그냥 끝나 버리게 돼. 대개는 혼란의 와중에 갑자기 끝나 버리지. 우리의 생이 종착점이 있는 아수라장이라는 사실만 안다면…….”
“네, 알만 해요. 아수라장 속에서나마 행복해지려고 노력해라?”
“살면서 행복을 바란다고 법을 어기는 건 아니잖니?”
“저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요.”
“행복한 적도 있었을 거야.”
“제가 온갖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는…….”
“남자들과의 실수 말이니?”
“아마도.”
“내 경우를 말해볼까? 내가 지금껏 저지른 실수만으로도 책 한 권은 너끈히 쓰고도 남을 거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누구에게나 끔찍한 일이 일어나. 삶이란 게 기본적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까. 그렇지만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내가 지금 행복해보이니? 나 역시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아. 하지만 특별히 불행하지도 않아.”
나는 커피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2권 pp.362~363
난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엄마를 한 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엄마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운 걸 단 한 번이라도 대단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던가? 엄마가 얼마나 굳은 결심으로 그렇게 사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었던가? 정말이지 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엄마는 지지리 궁상을 떠는 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20년도 더 된 옷을 입고, 소파의 천이 너덜거려도 갈지 않고, 좁아터진 아파트에서 혼자 살아가는 걸 바꿔 볼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내가 당신 같은 생을 살지 않아도 되게, 내가 생의 후반기를 편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게 배려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 역시 남자들에게,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 흔들리는 인생에 배반감을 느끼며 살았다. 엄마는 내가 달리 살기를 바랐겠지만 나 역시 별반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엄마는 당신의 생을 무너뜨리고 힘겨운 궤도로 몰아넣은 아버지의 배신에 대해 40년간이나 함구하며 살았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이기적인 불평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며 살았다. 엄마는 수없이 인내했고, 생전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영웅적으로 살았다.
---2권 pp.395~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