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북한을 철 지난 헤어스타일의 부유한 천덕꾸러기 청년이 통치하고 중국에 빚을 진 저개발 공산국가, 그래서 정상적인 정치적 지렛대에 둔감하고 외면당하는 위험한 집단으로 본다. 하지만 북한은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상황에 갇혀 있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산업 경제가 부상하지 못하면서 북한 정권에는 외부 세계를 믿지 않을 정당한 이유가 생겼으며, 명백한 생존 위협에서 확실하게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북한의 처지에서 자신들의 행동은 생존 투쟁의 불가피한 부산물이다.
- p18 '제1장. 서론: 평양 패러독스' 중에서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실 6월 25일에 김일성이 남한 침공을 시작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보다 더 흥미로운 의문은 한국전쟁의 시작 시점이 언제인가다. 전쟁의 불가피성은 처음 분단됐을 때부터 존재했다. 분단으로 평화는 이미 물 건너간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전쟁의 기원은 1946년 총파업과 폭동일까? 1948년 제주도 사람 일부를 보호하기 위해 박헌영이 벌였던 게릴라전일까? 1948년 벌어진 남한과 북한 사이 소규모 충돌들의 연장선상에 있던 여수·순천사건일까? 언제 긴장이 고조되어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 p81 '제2장. 철의 장막 열어보기' 중에서
전쟁 기간과 그 이후에는 경제 붕괴와 자연재해로 기근이 극심했다. 미군이 수력발전소와 댐을 파괴해서 발생한 비자연적 재해도 한 요인이었다. 티푸스와 콜레라, 수막염과 결핵이 북한을 덮쳤다. 전쟁의 마지막 6개월은 전선에서 사망한 군인보다 결핵으로 사망한 군인이 더 많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살아남은 군인 중 25만 명이 결핵에 걸린 상태였으며, 한국인 6명 중 한 명이 이 병으로 사망했다. 결핵으로 북한은 산업사회로서의 생명이 끝났다. 묵시록의 네 기사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을 행한 것이다.
- p90 '제2장. 철의 장막 열어보기' 중에서
전후 산업화와 경제 성장으로 북한은 생활수준이 올라가고 현대화와 도시화를 이뤘다. 비록 속도는 빠르지 않았어도 물질적 번영을 이뤘다.
교육과 산업화는 북한의 인구 분포와 사회구조를 재편성했다. 1946년 노동력의 4분의 3을 차지했던 농업 인구는 40년 사이 3분의 1로 줄어들었고 공장 노동자는 12%에서 57%로 늘어났다. 산업화는 도시화를 촉진했다. 1987년에는 전체 인구 60%가 도시에 살게 됐고 당시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도시화된 나라 중 하나였다.
- p126~7 '제3장. 김일성의 북한' 중에서
하지만 북한 난민들에게 진짜 장벽은 남한 정부다. 옌지시의 공항에는 서울 직항 항공편이 6편 있다. 남한 정부가 중국에 요청한다면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두 데려올 수 있다. 하지만 남한은 사람들이 홍수처럼 밀려들기를 원하지 않으며 북한의 붕괴를 촉진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남한 정부와 국민 모두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정치적·재정적 부담을 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남한 국민 개개인은 북한에 사는 자신의 친척이 나오기를 원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의 친척까지 나오기는 원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 p179 '제4장. 기근, 시장, 난민, 인권: 김정일 시대' 중에서
현재 북한 경제는 시장레닌주의다. 당의 감시 아래 소규모 개인 기업이 운영된다. 이 시스템은 장마당 상인들이 세금을 내는 ‘공공-민간 자본주의’라는 용어로 설명된다. 의욕적인 부모는 자녀를 당보다는 무역회사에 취직시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벼락부자들은 한 해에 10만 달러를 내고 해외 거주 ‘허가증’을 살 수 있고, ‘몸값’을 지불하고 국가가 배정한 공장이나 농장에서 벗어나 장사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중앙배급체계의 배급량이 점점 줄어들면서 돈만 주면 거의 무엇이든 살 수 있는 평양의 통일시장 같은 시장이 번성하고 있다. 앞으로도 변화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시작될 확률이 높다.
- p197 '제5장. 김정은' 중에서
닫힌 문 뒤에서는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그 주동세력은 1990년대 말 기근 이후 성인이 된 ‘장마당’ 세대다. 장마당에는 중국 제품이 밀려들고 있다. DVD 플레이어 가격이 폭락하면서 남한의 드라마, K팝 DVD도 들어오고 있다. 계층에 상관없이 평양의 젊은 세대는 동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한류에 빠져 있다. 중국 영화, 미국 영화, 스파이 드라마 [에이전트 오브 쉴드] 같은 박스 세트는 장마당에 나오는 즉시 팔린다. 평양의 젊은이들에게 남한의 최신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소외된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 p221 '제6장. 북한의 일상생활' 중에서
북한이 세계에서 9번째 핵보유국이 된 것은 사실상 과거 미국 정부의 악의, 배신, 형편없는 위기관리 능력, 무능력이 결합된 결과다. 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 다음이다. 현재 북한은 핵확산의 원천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비난은 반드시 미국과 함께해야겠지만, 이 비난은 ‘원천’이라는 말을 ‘원인’이라는 말로 교체하면 힘을 갖게 된다. 남한 정부가 독립적 핵 억지력을 가지는 길로 간다면 일본의 강력한 견제를 받을 것이고, 남한과 일본 두 나라 모두 북한의 핵무기 보유가 미친 파급효과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 p267~8 '제7장. 핵 위기' 중에서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와 정상회담을 남한, 또는 미국이 쉬운 선택지를 ‘마음대로 고르도록’ 허용하려는 전주곡이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북한은 남한에 두 가지를 원한다. 첫째, 북한은 평화를 향한 로드맵 작성에 미국이 의미 있는 참여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문재인이 미국을 설득하길 바란다. 이 로드맵은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에서야 비로소 시작됐다. 두 번째,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같은 상징적 화해 움직임보다는 경제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원한다. 당장은 개성산업공단과 금강산관광특구의 재개다. 북한은 돈이 필요하다
- p297 '제7장. 핵 위기' 중에서
북한은 평화조약 또는 평화합의 후 조기 종전 선언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내 일부 세력은 그런 평화합의는 사실상 북한을 핵무장국가로 인정하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외교적 합의는 다른 무엇보다도 기술적 역량을 바탕으로 한다.
미국은 협상 결과로 몇백억 달러를 쓸 의지도 능력도 없다. 트럼프는 값싼 해결책을 찾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가 돈을 쓰려고 한다 해도 의회는 절대 예산 승인을 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 p317 '제8장. 외교: 화해와 고립 사이' 중에서
합의의 전체적인 틀은 미국과 북한에 달렸지만, 결말에 도달하려면 다양한 보장국가나 기부국가, 또는 둘 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정치적 역량 강화와 자금 확보다. 경제를 일으키려면 북한에는 엄청난 자원이 필요하지만, 북한은 미국이 아예 돈을 내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제네바 합의라는 선례에서 보면 미국은 잔돈 정도만 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용 가능한 합의가 되려면 1994년보다 훨씬 심각해진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할 상당량의 원조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재정 자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 p349 '제9장. 결론: 싱가포르 이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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