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아닌 실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있었다. 작가 김진명씨가 국제적인 핵물리학자 이휘소 박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것을 소재로 쓴 이 소설은 1993년 8월에 출간되어 채 일 년도 안돼 300만 부가 팔렸으며 영화로까지 제작돼 박정희 시대의 원폭개발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에 핵개발을 지휘ㆍ감독한 청와대 경제2수석실의 김광모 비서관은 이휘소 박사 관련설을 전면부인했다. 핵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 역시, “이휘소 박사의 전공은 핵개발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순수이론물리학”이라며 “그를 핵개발과 연관시키는 것은 난센스”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이 소설과 유사한 사건들이 당시 핵개발팀 주변에서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핵개발팀은 어떻게든 미국이라는 감시자에게 핵개발 사실을 숨겨야 했고, 미국은 핵개발의 단서를 잡아내려고 정보망의 촉수를 곤두세웠다.
1974년 11월 9일, 한국의 핵과학자 세 명이 극비리에 프랑스 파리 교외의 오를리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하늘은 몹시 푸르러 마치 이들을 반기는듯했다. 그러나 이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예전에도 수차례 프랑스를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방문은 그때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핵개발의 밀명을 띤 방문이니만큼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왠지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들은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개선문 옆 쿠버보아가에 숙소로 향했다. 이들은 택시 안에서 느닷없는 질문을 받고 깜짝 놀랐다. 택시기사가 “한국에서 온 과학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순간 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핵 관련 얘기는 물론 꼭 필요하지 않은 대화는 일체 주고받지 않았다.
『한국원자력연구소 30년사』에는 “1974년 11월 9일부터 12월 10일까지 주재양 외 2명, 핵연료 가공 및 재처리사업 추진차 프랑스 방문”이라고만 기록돼 있다. 프랑스를 방문한 그들의 구체적인 목적은 물론이고 나머지 두 명의 이름조차 언급이 없다. 취재 결과 주재양 씨 외에 원자력연구소 화공개발실장ㆍ한국핵연료개발공단 건설본부장을 지낸 윤석호 박사와 원자력연구소 핵연료연구실장ㆍ한국핵연료개발공단 핵연료연구부장으로 일한 박원구 박사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윤 박사는 “23년 만에 처음 공개한다”며 그 동안 가슴에 묻어뒀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윤 박사 일행이 핵연료 성형가공 시험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서커사와 체결한 직후부터 이들 주변에서는 심상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윤 박사의 증언이다. “다음 날 아침 재처리기술과 시설 도입에 관한 가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상고방 회사에 갔더니 한 직원이 '어젯밤 서커사에 화재가 발생했다'며 '절대 밤에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주의 를 줍디다. 당시 우리는 그 말을 크게 유념하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상고방사는 이들에게 안내인 겸 경호원을 붙였다. 그러나 가계약을 체결한 날 저녁 윤 박사 일행의 기술협상 창구였던 상고방사의 궤세라는 인물이 차 안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별견됐다. 사인은 심장마비. 그의 부인은 남편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며칠 동안 회사측에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윤 박사는 “일련의 사건들이 서커사 및 상고방사와 가계약을 체결한 날 발생했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이상했다”며 “귀국 비행기에 올라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회고했다.
더 이상 파리에 있을 분위기가 아니라는 판단 아래 떠날 채비를 하는데 출발을 재촉하는 사건이 또 터졌다. 숙소 옆 건물의 항공회사 대형 유리가 대낮에 굉음을 내며 폭발한 것이다. 그 일대에 수많은 경찰이 배치되는 등 분위기가 갑작스레 삼엄해졌다고 한다. 물론 윤 박사 일행이 느낀 불안감은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의 발로일 수 있다. 게다가 파리는 테러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윤 박사 일행이 이 사건들을 '미국이 보내는 경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만큼 핵개발을 둘러싼 미국의 방해는 집요했고 완강했다.
미국은 1974년 5월 인도가 지하 핵실험을 실시하자 세계 각국의 미 대사관과 정보 채널을 총동원해 각국의 핵개발 여부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또 원자력 수출국들과 함께 '런던클럽'을 결성해, 핵기술 후진국에 대한 핵물질과 장비의 수출은 물론이고 재처리ㆍ농축ㆍ중수제조 등 소위 민감한 기술의 국가간 이전을 엄격히 제한하는 핵확산금지조치를 강화해 나갔다. 이와 함께 당시 본격적으로 핵개발을 추진하던 브라질ㆍ아르헨티나ㆍ파키스탄 등과 이들 국가에 핵기술을 제공하려던 프랑스ㆍ서독 등에 압력을 넣어 핵기술 이전을 포기하도록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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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군정이 이 무렵 김구에 대해서는 완전히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던 반면, 이승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군정의 랭던 정치고문이 1946년 5월 24일 번즈 국무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언급돼 있다.
우리는 대체로 김구를 무시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실수로 말미암아 정치무대에서 거의 떨어져 나갔다. 반대로 이승만은 통일에 대한 여러 형태의 의견들을 규합하는 데 협조적이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이 과격한 반(反)연합국 시위를 하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또 그는 소련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취해 왔으며, 수많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시켜 왔다. 하지 장군은 이승만이 장차 임시정부에서 매우 필요하거나 바람직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민주적 인사들 가운데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그의 협조를 마냥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흔히 해방정부의 세 영수라 불리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가운데 유독 김구만이 정국 운용에서 미국측에 의해 철저히 배제됐음을 발견할 수 있다. 세 사람이 모두 망명세력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측이 김구만을 배재한 것은 그가 반외세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공공연히 반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이 김구의 대미(對美)관을 확인한 이후부터 그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김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최종 방침이 정해진 것은 1946년 6월이었다. 이 방침은 6월 6일자 「한국에 관한 국무부 정책교서」에 수록됐는데, 이것은 육군부와 해군부의 동의까지 얻은 것이므로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서술된 김구 관련 부분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최근 한국의 정치적 논쟁에서 태풍의 눈이 돼 왔던 특정 인사들이 일시적으로 정치무대에서 은퇴한다면, 미국과 소련 당국 간의 협정뿐 아니라 남한 내 여러 정파들간의 협정도 촉진될 것이다.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것은 표현의 자유 원칙에 대한 미국의 고집과, 공공연히 반소(反蘇)적인 특정 한국인 지도자들을 한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한 소련의 결정사이에 일어난 의견 충돌의 결과라고 해석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 지도자들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이후 한국에 돌아온 원로들로, 망명 한국인 단체를 구성하고 있다. 그들이 한국의 정치적 여론을 완전히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데나 남한에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사람들이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정치무대 출현은 소련과 협정을 맺는 데 어려움을 야기시킬 뿐 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들의 정치 참여는 한국에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반적으로 도움을 주기보다는 해를 준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 정책교서에는 김구를 정치무대에서 은퇴시켜야 할 이유들이 자세하게 언급돼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첫째 김구가 남한의 여러 정파들의 통합에 걸림돌이 된다는 점, 둘째 소련과의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최대 장애물이라는 점, 셋째 한국의 민주주의 건설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점, 그리고 넷째로는, 한국에서 미국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거추장스러울 뿐 아니라 해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점 등이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이유들을 내세워 김구를 정국 운용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이후 미군정은 본국 정부의 지침에 따라 김규식과 여운형이 중심이 돼 추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설립한 것도 이들의 정치적 입지를 제도적인 차원에서 보장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미군정은 김구가 만에 하나 정치적 소외에 대한 반발로 좌우합작운동을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 김구를 설득해 김규식을 지원하도록 유도하는 작업도 함께 전개했다.
그러나 김구의 입장에서는 미군정의 설득을 무작정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다. 김구 자신도 미군정이 자신을 정치무대에서 은퇴시키려 한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정국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일대 반격에 나섰다. 임정 추대운동이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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