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빠르고 부담 없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마저 빠르고 간단하게 만들어 내곤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찾을 때는 맛집 탐방을 하듯이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억지로 만든 은혜는 조미료로 맛을 내어 빨리 차린 음식 같습니다. 당장 입에는 자극적인지라 맛있는 것 같지만 우리 몸을 건강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저 집밥처럼 투박하지만 오래 끓여 진하고 깊은 맛을 는 은혜, 몸에는 체력이 되며 마음은 따뜻해지고 영혼의 배고픔을 채워 주는 온전한 은혜가 적은 시대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은혜는 감동을 줄 수 있지만 진정한 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 담긴 하늘에서 내리는 은혜를 기다리기가 마치 가뭄의 땅에 비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늘 성경은 우리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는가.
이 본질적 질문 앞에서 나는 은혜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은혜 빼고는 설명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벅찬 은혜를 품고 룻기를 묵상하는 가운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보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거대한 복음의 물결 가운데 보이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사랑하는 성도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 룻기에 담긴 복음을 가슴에 새기며 벅찬 은혜의 감격을 나누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 책을 엮게 되었습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룻도, 나오미도, 보아스도 아닙니다. 룻기의 진정한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요, 룻기를 짜내면 ‘하나님의 은혜’만이 보입니다.
그 은혜는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당시 가장 약자였던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하나님의 기업 무를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 인물들은 각자의 인생의 가장 낮은 곳에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을 만났습니다.
나오미는 기업을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는 싸움인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기업 대신 세상의 산업, 모압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남편과 아들
의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낮고 낮은 곳으로 흘러 모압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오미를 만나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오미를 거쳐 더 낮은 곳, 이방 여인인 룻에게까지 흘러갔습니다. 이들은 다 버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가장 낮은 땅 타작마당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이불을 덮었습니다.
그렇게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은혜는 결국 결혼하지 못하고 나이 들어 가던 보아스에게 미칩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의무에 순종하여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축복을 얻습니다.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 룻기의 모든 인물들은 그렇게 설명됩니다. 그 은혜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룻기의 역사 안으로, 은혜 안으로 복음 여행을 떠나게 합니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과 함께 낮은 땅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은혜의 생수를 나누어 마시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고 함께 깊은 은혜의 맛을 보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프롤로그」중에서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사는 땅은 흉년이고, 저주의 땅은 풍년이란 말인가?”
우리는 무의식 속에서 ‘베들레헴은 모든 상황 속에서도 풍년이어야 하고, 모압은 흉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다릅니다. 이상하게 하나님의 땅에 흉년이 듭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삶이 잘 풀리고 부요한데 하나님을 섬기는 내 인생은 막막하고 가난합니다. 여기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흔들리기 쉽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많은 사람이 흔들렸습니다. 저주의 땅,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결코 머물러서는 안 되는 땅이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명분 앞에서 많은 사람이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문제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심긴 그 가정에도 시련이 찾아들었습니다. 결국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 역시 풍요를 좇아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서 저주의 땅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좀 더 잘살겠다고, 넉넉하게 살아 보겠다고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놓아 버리고 모압으로 이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에서 육으로의 선택이었습니다. 축복에서 저주를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모압 땅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기대했던 풍요가 아니라 사망이었습니다.
모압이 어떤 땅입니까? 소돔 성의 심판에서 롯의 아내가 저주를 받아 소금기둥이 된 후, 롯이 두 딸과 동침하여 낳은 아들 모압과 암몬의 후손들이 살던 도시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저주가 얼마나 단호했는지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게 하셨습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신 23:3)
엘리멜렉의 가족이 다른 곳도 아니고 모압을 선택한 것은 인간적인 어리석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압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과 타협하고, 불신앙적인 선택, 육적인 선택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고 불신앙적 선택을 한 엘리멜렉의 가정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룻 1:3)
엘리멜렉의 ‘엘리’에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멜렉’은 ‘왕’이라는 뜻입니다. 곧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엘리멜렉은 마땅히 하나님이 주인 되시고 왕 되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의 이름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었고, 그 삶에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족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도 알지 못 하는 놀라운 섭리, 왕의 계보의 시작이라는 비전을 그 가정에 담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 원하는 대로 살아도 엘리멜렉의 가정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른 가정은 모압으로 이주해도 이 가정은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남아 절대 믿음을 가지고 흉년을 잘 인내해야 했습니다. 그 가정에 심은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실현되기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절대 믿음’을 놓아 버렸습니다. 결국 풍요를 좇아 왔는데 풍요는 누려 보지도 못한 채 죽음의 고통이 이 가정을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왜 하필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가정이었을까? 흉년을 피해 많은 가정들이 베들레헴을 떠 나 모압으로 이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가정은 문제 삼지 않으시고, 유독 엘리멜렉의 가정을 향하여 “너희는 안 돼”라고 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나도 대강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대강 살고, 대강 믿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대강 사는 삶의 자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내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엘리멜렉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들의 삶의 터전은 모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곳에나 가서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믿음을 지켜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베들레헴의 흉년처럼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심으신 섭리는 이렇게 시련과 함께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으심을 받고 섭리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니 가장 먼저 사울을 통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셉도 꿈을 꾼 후에 종살이와 감옥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시련을 통과하지 않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어렵더라도 당신의 가정에 심긴 장차 다가올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엘리멜렉의 가정에서처럼 그 시련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국가적인 시련일지라도 말입니다.
--- p.22~26
실패도 성공도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모두가 나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것뿐만 아니라 안 좋은 것도 나 하나 건지고 만들어 가시기 위해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나는 어릴 적 부모 없이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인생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하게 어느 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 부모님을 빼앗아 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지금의 나 ‘유재명’을 만들기 위해 부모님을 희생시키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에 안양 갈멜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원에 오셨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기억에 남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나의 어릴 적 이야기와 아픔을 잠깐 나누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예배당에서 걸어 나오는데 한 노인이 나를 불렀습니다.
“목사님, 저 좀 봅시다.”
그분은 내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보니 하나님이 목사님에게 많은 투자를 하셨네요. 목사님 대충 사시면 안 됩니다. 쓰러지면 안 됩니다.”
지금은 그분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는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그날의 깨달음은 내 인생에 가장 값진 보물이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아픔, 교회의 아픔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아, 저 목사는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 하며 함께 공감해 주고 위로해 줍니다. 그러나 그 노인은 내 이야기를 듣고 인간 유재명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에 집중했습니다. 하나님의 투자를 본 것입니다.
지나온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나를 위한 섭리와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일어난 사건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삶에서 사람을 거부하고, 환경을 거부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붙이시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고난과 주변의 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투자를 하시는 것입니다. 실수가 없으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믿습니까?
…
아내가 결핵 판정을 받은 후, 어느 날 내가 세수를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걸 받지 못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아내는 기력이 없어 송장처럼 누워만 있었습니다. 아내 역할도, 엄마 역할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수를 하다 말고 나와서 전화를 받으려는데, 갑자기 속이 너무 상했습니다. 전화를 받는다는 게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어 벽에 던져 버렸습니다.
도대체 내 아내가 왜 아픈 걸까 원망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미운 마음도 싹텄습니다. 아내가 너무 미웠습니다. 긴 병에 효자 효부 없다고, 빨리 이런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목사인 내가 말입니다.
견디다 못해 3주 동안 금식 기도 하자 생각하고 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기도는커녕 2주를 굶기만 했습니다.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데 무슨 기도가 됐겠습니까? 그러다가 어느 설교 테이프를 틀어 놓고 듣고 있는데 갑자기 설움에 북받쳐서 울음이 나왔습니다. 설교 내용에 은혜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신세가 처량해서 울었습니다. 그렇게 울며불며 기도하는데, 순간 하나님이 내 마음을 깊이 만지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마음에 이런 음성이 울렸습니다.
“네 아내가 왜 아픈 줄 아니? 너 대신 아픈 거다. 너를 위해서 아내가 희생하는 거다. 그런데도 아내가 미우냐?”
순간 내 안에 자아가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를 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 주변에 아픔이, 내 주변의 실패가 그냥 있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 내 가족을 왜 빼앗아 갔어요? 돈을 왜 빼앗아 갔어요? 건강을 왜 빼앗아갔어요?’ 하는 마음에 원망이 듭니까? 하지만 그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 그 은혜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 p.59~62
베들레헴이 약속의 땅이기는 하지만 룻의 현실은 불확실했습니다. 오늘은 보아스의 밭에서 은혜 가운데 이삭을 줍고 있지만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할지 염려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은 그런대로 넘어갔다 치지만 내일이 염려입니다. 누구나 내일이라는 부담을 품고 살아갑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보장된 미래를 그리며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일은 어디에서 일하지?’, ‘다음 달에도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룻의 처지도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땅주인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갈 필요 없다. 내일도 여기서 계속 이삭을 주워라” 하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 말은 섭리 안으로 들어온 룻의 내일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염려는 대부분 오늘이 아니라 내일입니다. 오늘은 그냥저냥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일이 염려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신부 된 그리스도인들이여, 하나님은 내일 일은 신랑 되신 주님께 맡기고 오늘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참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문제는 내일 일, 한 달 후의 일, 1년 후의 일, 10년 후의 일이지 오늘 일은 아닙니다. 사업장이 망해도 당장 오늘은 괜찮습니다.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지 오늘은 그런대로 살만 합니다. 어떤 부모는 이제 막 태어난 딸을 안고 ‘이 아이를 20년 후에 어떻게 결혼을 시키나’ 걱정합니다. 나중 문제를 미리 염려하는 것입니다.
나중이 염려되니 더 많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책을 읽고 남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사람은 똑똑해질수록 염려만 더 많아집니다. 아는 것이 많아지니 더 잘 살 것 같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습니다.
무서운 것은 그 염려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너희의 내일은 하나님 손에 달렸으니 주께 맡겨 버리라”는 것인데, 내일 일을 미리 염려하면서 주님의 말씀도, 오늘의 행복도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나 역시 모진 인생 살다 보니 다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만 살자. 죽어도 내일 죽고 오늘은 살자’하고 생각했습니다. ‘내일 포기해야 하니 오늘이라도 최선을 다하자’ 생각하며 하루하루 살다 보니 어느새 축복의 나이인 60이 되어 가고, 목회도 28년째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감동입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라 하면 절대 못할 일인데 내가 그 시간을 버티며 지내온 것이 은혜입니다.
‘앞으로 1년 동안 바르게 살자’ 하면 자신이 없습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10년을 버텨야 한다’ 하면 그 시간이 까마득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것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하루 주님이 기뻐하실 모습으로 살아 보는 것은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그것이 쌓여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오늘을 무너뜨립니다. 새벽 기도도 내일부터 하고 오늘을 쉬라 합니다. 오늘만 죄를 지어 보라고 유혹합니다. 그렇게 오늘의 재미에 취해 미래까지 무너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일은 커녕 당장 오늘 이삭을 주워 야 먹을 수 있는 룻과 인생들에게 내일을 보장하십니다.
--- p.85~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