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또예프스끼를 향한 나의 편집적인 열정은 급기야 그의 소설을 러시아어로 직접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고, 당연한 귀결로 전공을 바꿔 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십수 년이 지난 과거 학창 시절의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그때 도스또예프스끼와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스또예프스끼와의 만남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일부에 들어와 있고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그 [열병]이 지금 기획하고 있는 러시아어 완역판 『도스또예프스끼 전집』에 되살아나고 있고 머지않아 그 결실이 맺어질 것이다. ---「1993년 [허무 속에서 그를 만났다」중에서
책은 어느 순간에 다시 살아 나온다. 책은 잠을 자고 있는 듯이 잠자코 있다가도 이야기를 시키면 끊임없이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어떤 때는 자기 이야기에만 열중하는 듯하다가 딴지를 걸면 또 거기에 대꾸하기도 하면서. 책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 이런 것들이다. 책은 한 권의 책으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살아 있는] 인격체로 변모한다. 글쓴이가 영혼을 불어넣고, 만든 이가 옷매무새를 잘 매만져 주고, 읽는 이가 살아 움직이게 한다. ---「1999년 [책은 살아 숨 쉰다」중에서
한 나라의 문화 역량과 문화 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미디어가 출판이다. 일본이나 영국이 여전히 세계적 수준의 출판 대국이 될 수 있는 배경에는 철저한 출판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출판계 전체가 전자책이나 인터넷 사업 쪽에 휩쓸려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문화적 토대로서의 출판 본령]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할 것을 고언(苦言)한다면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일까. ---「 2000년 [출판 대국이 문화 대국」중에서
1980년대 중반에 출판을 시작한 나는 외람되게도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불문율을 하나 정했다. 그것은 중역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설사 불가피하게 중역을 하게 되더라도 일본어판만은 절대 번역 대본으로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외국의 주요 저작들을 일본보다도 먼저 발간해 보자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본에 대한 [문화 콤플렉스]를 억지 춘향이식으로 비껴가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터인 이런 불문율이 무슨 소용일까마는, 문화적으로도 [그] 일본 출판물로부터 이제 좀 독립해 보자는 심사가 더 크게 작용했다.---「 2001년 [일본 출판 문화 콤플렉스」중에서
결국 어떤 책이 양서인가 아닌가는 〈무엇〉을 다루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무엇을 〈어떻게〉 다루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저자나 편집자가 그 〈무엇〉에 대해 얼마나 천착하고 있으며, 얼마나 〈제대로〉 요리했는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책을 잘 골랐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특정한 책을 이용하는 〈마지막〉 독자에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2003년 [어떤 책이 좋은 책인가」중에서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독서 방법에 왕도는 없는 셈이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또 철저하게 재미있는 것부터 읽으면서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독서 습관을 들여 가다가 생에 딱 한 번만 꼭 마음에 드는, 나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된 어떤 주제나 어떤 인물을 정하면 바닥까지 훑어가는 저인망식 독서를 하기를 바란다. ---「2009년 [닥치는 대로 혹은 집중 탐구식으로 읽기」중에서
책 표지 디자인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자의 [시선 끌기]입니다. 디자인 구성 요소들이 강약의 조화를 이뤄 하나의 표지로 완성될 때 디자인의 미학적 가치도 생겨납니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작업했던 모든 표지에 애착이 갑니다.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프로이트 전집』을 꼽을 수 있겠네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초상을 그려 디자인하는 등 공을 많이 들였었는데, 독자들에게 심플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2009년 [책과 여행은 좋은 책 만드는 원동력」중에서
독창성도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독창성은 새로운 걸 창조한다는 말인데 흔히들 얘기하듯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어요. 기존의 것을 비틀어 보거나 이것과 저것을 합쳐 만들어 낸 [다른 것]이 결국 새로운 것이지요. 많이 보고 듣고 사고해야 독창적인 무엇이 나오지요.---「 2009년 [《내가 걸어가는 길이 출판의 역사다》라는 신념으로]
내가 생각하는 기획이란 이런 거다. 책을 낼 때 그 책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고안하는 것. 책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 우리가 『북캐스트』를 낸 이후에, 그것은 참신한 홍보 수단으로 떠올랐다. 색다른 방식이었다. 돈을 들여 하는 광고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가능하다. 출판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걸 생각해 내야 한다. 좋은 작품을 잘 찾는 것도 기획이지만 책 한 권을 만들 때 그에 따르는 아이디어를 고안해 내는 것, 그런 것이야말로 진짜 기획이 아닐까. ---「2013년 [선배 홍지웅에게 묻다」중에서
나보고 일 중독자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책 보는 것, 디자인 생각하는 것, 내 일이기도 하지만 취미이기도 하거든요. 전 『장미의 이름』을 네 번 탐독했어요.
새로운 버전을 만들 때마다 꼼꼼하게 읽는데, 또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와, 이거 정말 번역이 기가 막히다 하면서. [장미는 예로부터 그 이름으로 존재해 왔으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뿐.] 이런 식의 표현 있잖아요. 곱씹을수록 그렇게 기막힐 수가 없어요. 지금도 그런 거 볼 때마다 와, 에코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그런 게 최고의 낙이죠. 그리고 뮤지엄에 사람들 많이 와서 좋아하면 기분 좋고. 딱히 뭐, 다른 건 없어요. ---「2015년 [책 자체가 또 하나의 예술」중에서
과거 도서 시장에는 밀리언셀러가 많았지요. 지금은 밀리언셀러 대신 30만 부 정도의 책 3권이 팔린다고 보면 됩니다. 그만큼 출판 시장이 독자 수요가 다양해졌어요. 이건 바람직한 일입니다. 독자들의 취향은 다양해지고 또 그만큼 책도 다양해졌으니까요. 천편일률적인 취향과 편향된 유행보다는 이렇게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감동이 바로 주인이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