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옆에는 스툴이 있다. 위엄 있는 붉은색에 금빛 왕관 장식이 달려 있고 구불구불한 글씨로 ‘Writer’라고 적혀 있다. 아이들이 자신이 쓴 글을 낭독할 때 앉는 의자다.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아이들은 선반에 쌓여 있는 큰 주사위를 가지고 와 던진다. 주사위에는 6개의 숫자가 아니라 6개의 질문이 있다. “이야기의 주제는 ____이에요.” “나는 ____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주인공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여러분은 주인공에게 무엇을 물어보고 싶어요?” “여러분에겐 어떤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나요?” “여러분은 이야기 중에서 어느 부분을 바꾸고 싶어요?”
---「‘카인드니스(kindness)’ 요리법」중에서
코알라(Koala)의 K, 기사(Knight)의 K, 키위(Kiwi)의 K, 키스(Kiss)의 K. 각 물건은 지금 선생님이 칠판에 적는 글자 K와 관련된 것이다. “K로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중요한 물건을 갖고 오세요.” 선생님이 내준 숙제였다. 책상이 아이들의 소중한 물건으로 가득하듯이, 교실은 지금 글자 K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독일의 1학년생들은 학기 초가 되면 무엇보다 글자를 올바로 쓰는 법을 배우지만, 뉴질랜드 아이들은 일단 글자를 사랑하는 것부터 배운다. 글자 B를 공부할 때 선생님은 고집 센 빨간 풍선(Ballon) 이야기를 들려준다. 풍선은 남자아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닌다. 책을 읽고 나면 아이들은 직접 빨간 풍선을 하늘로 날리고 자기 것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글로 적는다. 글자 I를 배울 때는 선생님이 단어 아이스크림(Ice Cream)을 대문자로 포스터에 쓰고, 아이스박스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채우고, 학교 마당으로 난 1층 창문을 연다.
---「글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중에서
어느 날 저녁 사이클론이 뉴질랜드로 접근하고 있었다. 남편은 사흘간 강에서 카누를 타려고 이미 몇 시간 전에 집을 나섰다. 나는 걱정이 되어 남편이 있는 곳의 날씨가 어떤지 알아보려 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갑자기 집이 깜깜해졌다. 정전이었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어둠 속에 누워 바람의 속도가 갈수록 빨라지고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들린 둔탁한 소리는 또 뭐가 쓰러졌음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아침 선생님은 2학년 아이들에게 지난밤에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적어보라고 했다. 글쓰기 욕구를 자극할 만한 얘기를 덧붙일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아이들은 열심히 공책 위로 고개를 숙이고 글을 썼다. 그중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빗방울이 젤리빈처럼 후두둑 쏟아졌다.” “처음에는 바람이 우리 집 주변을 도둑처럼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글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중에서
실비아 애슈턴 워너는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낱말을 소리 내어 발음하지 못할 만큼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얘기한다. 랑기라는 이름의 소년은 애슈턴 워너 선생님에게 ‘오다’와 ‘보다’라는 낱말을 말했다. 선생님은 두 낱말을 적어주었지만, 랑기는 다음 날 아침에 카드 더미에서 그 낱말들을 찾지 못했다.
이후 선생님은 그 낱말 카드를 버렸다. 아이는 자기한테 맞는 낱말을 분명히 찾아낸다고 애슈턴 워너는 확신한다. 그걸 일컬어 그녀는 ‘첫눈에 알아보는 낱말(One look words)’이라고 한다. 첫눈에 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낱말이 분명히 존재하므로 우선 그걸 찾아내야 한다고 한다.
얼마 후 실비아 애슈턴 워너 선생님은 랑기의 아버지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불법 도박장을 운영하고, 경찰이 주시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랑기를 다시 만난 날 선생님은 아이에게 ‘경찰관’과 ‘감옥’이라는 낱말을 적어주었다. 랑기는 4분 만에 두 낱말을 익혔다. 애슈턴 워너는 이 낱말들을 키워드라고 명명했다. 랑기의 삶으로 들어가는 열쇠이자, 그의 마음속에 쓰기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책 퍼레이드」중에서
현재 스티븐 베이커(Stephen Baker)가 그 지방의 외딴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현대 기술을 좋은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그는 학생들이 시골 어디에서나 같은 책을 읽고 트위터로 토론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를 위해 그는 2016년에 트위터 그룹을 만들고 챕터챗(ChapterCha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뉴질랜드 교사들이 서로 연결돼 있는 수많은 페이스북 그룹 중 하나를 통해 자신의 제안을 전파했다.
약속한 날에 그가 로그인을 했다. 조금 불안했다. 그 혼자만 참여하는 건 아닐까? 기우였다. 처음 시작하자마자 100개 학급이 참여했다. 어느덧 학생들은 열네 권째 책을 읽고 있다. 스티븐 베이커는 이 과정을 조금 정교하게 다듬었다. 전국의 교사들이 책을 추천하면 그가 한 권을 선정하고 각각의 장마다 숙제를 낸다.
19세기를 배경으로 미국 중서부에 살던 잉걸스 가족의 이야기 『초원의 집』을 읽을 차례가 되었을 때, 아이들은 잉걸스 가족이 사는 집의 평면도를 그리거나, 자신이 잉걸스네 아이 중 한 명이라면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할지 적어야 했다. 네 명의 아이가 아마존에 추락하는 모험 소설 『탐험가』를 읽은 뒤에는 비행기 모형을 만들고, 뉴질랜드에서 조종사가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알아내고, 책의 내용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의 예고편을 만들어야 했다.
---「책 퍼레이드」중에서
뉴질랜드에서 자주 그러듯이 해가 났다가 비가 내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나는 3학년 교실을 참관한다. “오늘 아침에 아주 예쁜 무지개가 떴어요.” 선생님이 말하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도 무지개를 보았다. 한 여자아이가 무지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설명하려는 순간, 선생님이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댄다. “지금은 무지개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부터 말해봅시다.” 객관적인 것 대신에 주관적인 것, 사실 대신에 인상을 다룬다.
실비아 애슈턴 워너도 그렇게 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작은 말풍선을 그린 뒤, 아이들에게 무지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낱말을 말해보라고 한다. 따뜻하다, 활기차다, 색이 흐릿하다, 즐겁다 등의 단어가 나온다. 순식간에 말풍선이 낱말로 가득 찬다. 선생님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여러분이 내 말풍선을 빵 터뜨렸어요!” 아이들이 키득키득 웃는다.
선생님이 말풍선을 새로 그린다. 아까보다 조금 크다. 아이들이 더 많은 단어를 열거한다. 말풍선이 또 터지고 선생님이 세 번째 말풍선을 그리자 아이들이 무척 즐거워한다. 말풍선이 터지면 또 새로 그리는 과정이 몇 번 반복된다. 마지막에 가서는 무지개를 얼마나 다양하게 묘사할 수 있는지를 보고 아이들이 놀란다.
---「교실에 들어와 함께 배우는 개」중에서
실비아 애슈턴 워너가 늘 강조한 것이 있다. 아이는 자신이 글로 쓰는 것의 주인이 되어야 하며, 이는 아이가 쓰는 내용이 진정한 체험, 그리고 마음 깊숙이 느낀 체험에 기초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은 나의 두 딸이 쓴 문장에도 해당된다. 딸들은 몸의 움직임과 자유에 대한 충동에서 느낀 큰 기쁨을 글로 들려주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모든 아이들이 자기만의 문장을 쓰기 때문에, 마지막에 그 결과물이 교실에 나란히 걸리면 그건 다양한 개성을 비추는 작은 거울이 된다. “I am a sp hr.” 내가 참관한 1학년 교실 벽에 이런 문장이 걸려 있다. 그 옆에는 “I am a sl b.”라고 적혀 있다. 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이 아이들은 자신이 무엇이 가장 되고 싶은지 글로 적었다. 누구는 슈퍼 히어로(superhero, sp hr)가 되는 꿈을 꾸었고, 누구는 제 목표를 벌써 이루었다. 스쿨 보이(schoolboy, sl b)가 되고 싶은 아이였다.
---「교실에 들어와 함께 배우는 개」중에서
1학년 때부터 학생들은 작문을 할 때 ‘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의 문제에 주의 깊게 답해야 한다. 개인적인 학습 목표는 공책 앞부분에 적어놓는다. 누구는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목표이고, 누구는 단어 사이를 더 크게 띄어 쓰려고 노력한다. 3학년생들은 자신의 마지막 생일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
그 전에 선생님은 미리 훌륭한 글쓰기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정확히 설명한다. 그건 도입부, 사건 1, 사건 2, 사건 3이다. 당연히 감정도 빼놓으면 안 된다. 빠뜨린 것이 없나 확인하기 위해 마지막에는 텍스트의 각 부분에 색칠을 한다. 예를 들면 사건은 파랑으로, 감정은 노랑으로, 동사는 초록으로 표시한다. 내가 구경했던 아이들의 공책에는 도장과 함께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문장 구호, 대문자 사용, 맞춤법을 확인했나요?”
---「교실에 들어와 함께 배우는 개」중에서
화나웅아탕아는 정확히 말하면 스스럼없는 개방감이다. 처음에 나는 이걸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다. 화나웅아탕아는 쉬는 시간에 비서 선생님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그의 일을 대신하는 아이들이고, 아침에 자녀를 데려다주고 선생님과 수다를 떠는 학부모들이다. 화나웅아탕아는 아이들이 마오리어와 영어로 국가를 부르며 시작하는 학교 총회다. 국가가 끝나면 교장 선생님의 제안으로 우스꽝스런 노래를 부르는데, 가사엔 머리 모양이 또 엉망이 되었다는 어느 날의 이야기가 나온다.
---「미세스 맘」중에서
실수는 없던 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생님은 말한다. 오히려 어느 아이가 실수를 하면 이런 말을 들려준다. “이제 네 두뇌가 조금 더 자라는 거야.” 1학년생들은 이 말을 하도 들어서 선생님이 “실수는…….” 이라고 운을 떼면 입을 모아 “내 두뇌를 자라게 한다.”라고 대답하며 문장을 완성한다.
---「사모아 주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