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애들은 쉬는 시간에도 우리 반 문 앞을 기웃기웃거리고, 복도에서 만나면 또 뽀쪼르르 와서 “선생님!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라고 하질 않나. (걔네 담임선생님이 들을까 봐 나는 또 전전긍긍.) “선생님, 우리가 좋아요, 지금 애들이 좋아요?” 같은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을 요구했다. 아이구, 두야. “우리 반 수업하고 있는데 자꾸 인사하면 어떡해!” 얘길 했더니, ‘우리 반’에 자기는 없는 거냐고 사랑이 이렇게 쉽게 변하냐고 씩씩댔다. 얘들아, 너넨 몰라. 처음에는 마음을 끌어내어 사랑한다, 사랑한다 말하다가 정말로 사랑하게 될 때쯤에 떠나보내야 하는 내 맘을 모른다고.
--- p.35, 「잦은 이별은 적성이 아닌데」 중에서
상담의 장르로는 추리물(아이 행동의 원인을 함께 추적해야 함), 시대극(칠삭둥이인지 여부, 한글은 언제 뗐는지 등 아이의 역사를 알게 됨), 영재발굴단(아이의 대견하고 영특한 면모를 끊임없이 알 수 있음), 반전공포물(학교와 집에서의 모습이 몹시 다름. 보호자와 나 모두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됨), 장편영화(일단 길고 끝나지 않는 상담이 여기에 해당), 비극(몹시 슬프고 슬퍼짐), 코미디(지붕 뚫고 하이킥을 해야 할 것 같음), 판타지(믿을 수 없음), 독립영화(어쩐지 밑도 끝도 없이 괜히 술이 땡김) 등이 있다. (예를 줄줄이 열거하고 싶지만 상담으로 논문 한 편을 쓸 것 같아서 과감하게 생략한다.
--- p.45, 「이토록 짜릿한 전화」 중에서
애들이 입술 안 발라도 아파 보인단 얘기 안 들으면 좋겠어. 옷에 몸을 맞추려고 건강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머리가 짧은 운동부 애들이 남잔지 여잔지 묻는 말을 덜 들었으면 좋겠어. 내가 화장을, 다이어트를, 꾸밈을 안 하는 게 적어도 하나의 선택지나 예시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어.
--- p.80, 「언니에게」 중에서
신이 교사 지윤을 만들 때… 명랑함 한 스푼, 공감능력 한 스푼,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한 스푼, 그리고 단호함을─ 넣었어야 했는데 까먹었다!
--- p.91, 「신이 교사 지윤을 만들 때」 중에서
승은이는 자주 덥석 팔을 잡고 나를 당기면서 신기한 말을 한다. 오늘은 “선생님은 저랑 천고마비예요!”라고 했다. 살쪘다는 건가, 머리를 도록도록 굴려보며 뭐라고 대답할지 고민했다. 요즘 좀 많이 먹긴 했지. “우리가 천고마비구나, 그게 무슨 뜻이야?” 하니 나랑 자기랑 마음이 통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승은이는 입술이 뾰루퉁해져서는 교과서에 나온 말인데 벌써 까먹었냐고 나를 타박했다.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천고마비를 그런 뜻으로 가르친 적이 없어서 억울했다. (…) 천고마비와 마음이 통하는 사이에 대해 한참 고민하다가 “아! 천생연분?” 했더니 바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이라고 했다. “척 하면 척 알아들으니까 우리는 천생연분.”이라고 승은이는 세 번은 더 말했다.
--- pp.106~108, 「선생님은 저랑 천고마비예요」 중에서
승은이는 언제나 나를 살폈다. “선생님 소멸될 것 같아요.”는 ‘소진된 것 같아요’라는 뜻이었다. 소멸이나 소진이나 닳아 없어지는 건 똑같다는 점에서 별로 고쳐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에서 읽었는지 나와 영원을 약속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머리카락을 뽑아갔다. 대체 무슨 책을 읽은 걸까.) 승은이의 얼렁뚱땅한 말들을 들어주고 무슨 뜻인지 알아채기 위해서라도 소멸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애들은 자기를 봐달라고, 자기 얘기를 더 들어달라고, 자기를 더 예뻐해달라고 말하는데. 승은이는 언제나 내가 세상에 잘 붙어 있는지를 확인하려 들었다. 없어지지 마세요, 사라지지 말아요, 소멸되면 안 돼요, 그런 말을 했다. 세상과 나의 틈을 꼭꼭 붙여놓으려는 것 같았다.
--- pp.107~108, 「선생님은 저랑 천고마비예요」 중에서
일기를 곰곰이 따라가면 어린이의 작고도 큰 세계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작은 기쁨과 행복들, 작지 않은 슬픔들, 걱정과 두려움, 자신감과 결심. 언제 행복한지 언제 슬픈지, 얘한텐 뭐가 중요한지 알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걸 알게 된 이상 얘를 싫어할 수는 없다.
--- p.115, 「일기와 일기 사이」 중에서
용기 내어야 하는 일이 최대한 없기를, 행운에 기대야 하는 순간들이 없기를, 이겨내야 할 상황이 없기를, 순한 마음을 가져도 되기를. 네가 너와 싸우지 않으면 좋겠어, 같은 말들을 썼다. 펜을 꼭 쥐고 일기 아래에 쓴 나의 끼적임들이 훌쩍 지난 어느 날에라도 아이한테 닿았으면 하다가, 어쩌면 나는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 p.118, 「일기와 일기’ 사이에서)
습관적 쿨한 척을 하지만 사실 쿨하진 않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겁이 많고, 아이들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지 매일 겁낸다. 4학년 교실에서 만난 하나는 탁, 겁부터 나게 하는 학생이었는데 걔는 인생 2회차 같은 표정으로 머리를 잔뜩 앞으로 늘어뜨리고는 인상을 팍 쓰면서 나를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애들의 시니컬함이야, 뭐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고 자신이 있었다. 나는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재밌는 선생이니까. 걔가 날 싫어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걔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난 괜찮아, 같은 씩씩함을 가장할 수 있었고 그걸 무기로 하나에게 차근차근 다가갈 계획이었다. (…)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하나는 여전히 인생 2회차 같은 예의 그 표정이었지만, 나는 걔의 그 표정 속에서 걔가 기쁜지, 슬픈지, 속상한지, 할 말이 있는지, 그런 걸 알 수 있게 되었다.
--- pp.163~166, 「볼 빨간 하나가 선생님을 챙기는 방법」 중에서
“회원님은 서 있는 걸 다시 연습하셔야겠어요. 서 있을 때 엄지발가락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요. 그래서 걸을 때에도 발을 툭툭 던지거나 끌면서 걷게 돼요. 서 있을 때도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앞꿈치 뒤꿈치를 붙이시고요, 걸어 다니실 때에도 이렇게 바닥을 미셔야 해요.”
(…) 그래도 스물여섯에 걷는 일을 새로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사실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걸 다시 배워도 괜찮다는 게 퍽 다정하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다시 해도 괜찮아, 같은 말을 해준 일이 없었다. 틀리고 싶지 않았고, 틀렸어도 틀렸다는 것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할 것 같아서 나를 몰아댔다. 내 답이 정답이 아닐까 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들은 목에 턱 걸린 것처럼 좀처럼 넘어가지 않았다. 왜 그렇게 틀리지 않고 싶어 했을까. 틀리면 그냥 다시 하면 되는데. 사실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다시 해도 괜찮다는 그 말 한마디였다는 것을 발가락이 욱신거리도록 다시 걸은 뒤에야 알았다.
--- pp.199~201, 「서 있는 것도 틀려보니 알겠다」 중에서
사람이 싫어지려고 할 땐 마구 비 오는 날이나,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을 생각한다. 오늘 비가 오나 보다, 그래서 물이 튀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한다. 날씨를 바꾸려고 전전긍긍하지 않는 것처럼, 날씨가 왜 이러지 마구 골몰하지 않는 것처럼. 이해하려고 애를 쓰고 쓰다가 내가 상할 것 같은 때에는 탁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건 그냥 나쁜 날씨 같은 거였어 하고.
--- p.292, 「싫어지는 마음」 중에서
언제나 쓰는 사람이고 싶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오늘과 내일 사이를 부드럽게 잇는 글. 미워하는 마음을 걷어내는 글. 더 많은 것을 헤아리고 싶은 글. 사랑했던, 사랑하는 이들과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글. 비틀거리며 견뎌왔던 시간들은 꼼꼼히 박음질하듯 써내고 싶고, 어슴푸레한 순간들에 선연한 빛을 더하고 싶다. 그런 글을 쓰려면 아무래도 두 배쯤 마음이 큰 사람이 되어야겠지.
--- p.304, 「오늘과 내일 사이를」 중에서
너의 예민함은 다르게 말하면 섬세함이야, 싫은 걸 굳이 애써 좋아하는 척할 필요는 없잖아, 지금 많이 지쳐 있나 보다, 애썼어……. 다른 이에게였다면 쉽게 건넬 말들을, 다 알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해주지 못하는 나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글을 써본다. 애썼어. 애썼어.
--- pp.305~306, 「오늘과 내일 사이를」 중에서
싫어하는 일을 조금 더 피해야지. 좋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지.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더 많이 만들어야지. 주저 없이 쓰고, 후회 없이 말해야지. 그렇게 꼼꼼히 하루와 하루 사이를 건너가야지. 그럴 수 있을 거야. 응원을 가득 담아 나에게.
--- p.306, 「오늘과 내일 사이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