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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1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448쪽 | 566g | 150*210*20mm
ISBN13 9788984372788
ISBN10 8984372781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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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위대한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생이 위대한 스승이 되게 하려면 먼저 환상과 자기기만을 벗어던져야 하는데 나의 경우 사랑이라는 감정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역으로 사랑 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가 허구한 날 눈이 빠지게 들여다보는 대차대조표와 같은 인생이 되지 않을까? 안정적일 수는 있어도 무미건조한 인생이 될 거야. 나는 폴을 사랑해. 폴의 재능, 지성, 무모하고 충동적인 면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사랑이야.
오후 6시가 막 지날 무렵, 나는 폴과 함께 장만한 19세기 고딕 양식집으로 돌아왔다. 폴의 차가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폴은 지난 몇 주 동안 집을 쓰레기장처럼 어질러놓았었는데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집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연락을 끊고 루스의 집에 가 있던 며칠 동안 폴은 어질러놓은 물건들을 정리하는데 그치지 않고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놓았다. 창문은 마치 유리를 끼우지 않은 것처럼 투명했고, 마루와 가구는 얼마나 정성들여 닦았는지 윤이 반지르르 흘렀다. 화병 예닐곱 개에는 싱싱한 꽃이 꽂혀 있었고, 오븐에서는 침이 절로 꿀꺽 넘어갈 만큼 맛있는 음식 냄새가 났다.
--- p.23

나는 문득 두려움이 일었다. 낯선 나라에 대한 두려움,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는다는 두려움…….
“에사우이라에서는 2천 달러 정도면 한 달 동안 지낼 수 있어.”
“6주는 내가 사무실을 비워두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야.”
“직원들한테 사무실을 잘 지킨 보너스를 준다고 해.”
“나를 새롭게 찾아온 고객들이 있을 경우 어떡하지?”
“7월 중순부터 9월 초 사이에 회계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시기적으로 회계사무소가 가장 한가한 때이긴 했다.
6주나 사무실을 비워도 괜찮을까?
물론 마음을 크게 먹고 보자면 6주라는 시간은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었다. 내 비서인 캐시와 실무담당자 모튼은 내가 없어도 일을 잘 처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일을 직접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로 인정할 수 없는 사실이 바로 ‘내가 없어도 세상은 아주 잘 돌아간다.’라는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고 결정할게.”
--- p.34~35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폴이 책임감이 없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폴의 보헤미안 같은 매력과 로맨틱한 분위기, 환상적인 섹스를 놓치기 싫어 애써 어두운 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사랑을 갈구한 나머지 폴에 대한 모든 의심을 머릿속 창고에 넣고 가두어버렸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면 폴의 무책임한 면도 바뀌게 될 거라는 제멋대로의 환상에 빠져 나 자신을 속여 온 셈이었다.
내가 폴에 대해 뭘 알고 있지? 과연 내가 폴에 대해 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지?
근본적으로 나를 기만하고 배신한 사람, 내 앞에서는 아이를 원한다고 말하며 몰래 정관수술을 받은 사람을 믿은 내가 바보였다.
나는 욕실로 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고 나서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 우울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 발코니로 나갔다. 아래에 펼쳐진 에사우이라의 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 p.107

우리는 ‘나는 왜 이리 불행하지?’ 라고 생각하며 불만을 토로하기 일쑤지만 정작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며 사는 게 아닐까?
사미라의 눈에도 폴에 대한 미움과 상처가 가득 차 있는 걸 목도했다. 사미라의 원망어린 눈을 보게 된 내 불운도 사실은 내가 자초한 셈이었다.
사미라의 엄마는 누구일까? 어디에 있을까?
손목시계를 보니 오전 6시 43분이었다. 정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려면 시간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았다.
폴은 사미라에게 문전박대 당한 뒤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도시에서 은신처를 찾으려면 틀림없이 친구를 찾아갔을 거야.
나는 폴의 일기장을 꺼내 원하는 페이지를 펼쳤다. 사미라를 되찾고 싶다고 쓴 페이지였다.
로맹 B. H.가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로맹 벤 핫산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나는 친절한 웨이터를 불러 폴이 갈겨쓴 주소를 보여 주며 위치가 어디쯤인지 물어보았다.
“카페를 나가 길 두 개를 건너면 됩니다.”
웨이터는 메모지에 약도를 그려주며, 5분쯤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벤 핫산의 집에 가면 폴이 간밤에 사미라를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고 와서 지쳐 곯아떨어져 있을 공산이 컸다. 폴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호텔을 잡아 혼자 잘 리 없었다.
폴은 벤 핫산의 집에 있을 거야.
--- p.184~185

“제가 오마르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에사우이라에 가 푸아드의 카페에서 폴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아마도 프랑스어 레슨을 받고 나서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을 겁니다. 폴이 서류에 서명하고 나서 저에게 첫 이자를 주었죠. 재정 문제에 해박한 회계사이시니까 차용증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날 에사우이라에서 함께 만난 공증인이 작성한 서류죠.”
벤 핫산이 재킷 주머니에서 세 장짜리 서류를 꺼냈다. 서류는 프랑스어와 아랍어를 혼용해 적혀 있었다. 나는 서류를 훑어보고 나서 맨 뒷장에 있는 폴의 사인을 확인했다. 공증인의 사인도 있었다.
서류의 두 번째 페이지에 내가 원하는 정보가 나와 있었다.
1백만 디르함을 10년 동안에 걸쳐 상환하기로 하고, 연간 16만 디르함, 한 달에 1만3천333디르함을 갚도록 되어 있었다. 월간 1,500달러, 연간 1만8천 달러의 원금과 이자를 갚아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 p.230

이튿날 아침 여섯 시에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아니라 엄마의 전화였다. 엄마는 목이 잠겨 목소리가 겨우 들릴 정도였다.
“네 아빠가 간밤에 죽었어.”
주위의 온갖 소리가 일시에 멈추며 세상이 온통 고요해졌다.
“카지노에서 5천 달러를 잃고 심장마비를 일으켰대.”
엄마는 라스베이거스 경찰이 해준 이야기를 나에게 고스란히 들려주었다. 밤새 돈을 딴 아버지는 주사위 한 번에 갖고 있던 칩을 모두 걸었다. 그 결과는 아버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몹시 큰 충격을 받아 혈관 이상을 일으켰고, 카지노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머릿속으로 아버지가 충격을 받고 쓰러지는 장면을 몇 번이나 그려 보았는지 모른다. 험한 세상에 나 홀로 버려진 것 같은 느낌과 끝을 알 수 없는 슬픔이 한동안 나를 휘감았다. 그 순간에도 ‘아버지를 구할 수도 있었어.’라는 후회와 자책감이 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고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때의 그 소리가 여전히 내 귓전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폴이 여태껏 나를 기만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나는 와르자자트로 가려하고 있었다.
--- p.240~241

“당신은 아마도 모로코에서 여자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혼전 임신이 들통 날 경우 그 어떤 말로도 가족들을 이해시킬 수 없죠. 물론 내가 피임약을 먹지 않아 임신이 되었어요. 폴하고 결혼할 경우 모로코를 떠나 미국에 가서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죠. 물론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폴을 이용하려 했던 건 아니었어요. 폴을 사랑했고, 폴도 나를 사랑했어요. 우리가 서로 사랑한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죠. 폴이 처음에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싫증을 내기 시작했어요. 폴에게 나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 수 있는 영주권만 받게 해주면 그 다음부터는 내 스스로 알아서 갈 길을 가겠다고 했어요. 폴은 내 제안을 거절했고, 나는 끔찍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죠. 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을 말한 거예요. 바로 그 순간부터 비극적인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졌죠. 아버지는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었어요. 아버지의 일에 방해가 될 경우 무자비한 응징이 뒤따랐죠. 벤 핫산도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일을 했다가 손을 못 쓰게 되었으니까요.”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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