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흔한 달개비꽃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하고 / 기차와 여관과 해안선과 강안을 좋아하게 만들고 / 바다의 수평선과 연緣을 맺어준 사람 / 슬픔이 거름이고 힘이고 지혜를 준다는 것과 / 나를 울게 한 이는 나라는 것을 알게 한 사람 / 모국어와 사랑에 빠지게 하고 / 마침내 시를 쓰게 한 사람 ---「한 사람 1」중에서
간간이 꽃 소식 들려왔지만 / 그럴수록 더 멀리 달아나려 애썼다 / 시간의 마디는 더디고 아팠으나 / 돌아보니 어느새 그날로부터 / 아득히 멀어져 / 나의 강은 바다에 다 와가고 있다. ---「찔레꽃」중에서
살구꽃 흐드러진 봄날 / 네게 엎지른 감정, / 울음이 붉게 타는 늦가을 / 나를 엎지른 부끄럼 / 시간을 엎지르며 나는 살아왔네 / 물에 젖었다 마른 갱지처럼 / 부어오른 생활의 얼룩들 -「엎지르다」중에서
비를 몰고 오는 바람 앞에서 파랗게 / 자지러지며 환호작약하는 여름날 나무들같이 / 청춘의 한때 누구나 죽음 같은 환희를 앓죠 / 그러나 영원히 부는 바람은 없어요 / 불시에 불어오듯 불시에 사라지죠 ---「바람」중에서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인가 / 누군가를 내가 울고 있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인가 / 수박 속을 수저로 파먹듯 이내 뻔히 드러나는 바닥의, / 달착지근한 서로의 생을 파먹다 / 껍데기로 버려지는 인연의 끝은 얼마나 쓸쓸하고 처량한가 / 변덕이 심한 사랑으로 마음의 날씨가 자주 갰다 흐렸다 한 / 사람은 알리라 / 때로 사랑은 찬란한 축복이 아니라 지독한 형벌이라는 것을 ---「누군가 나를 울고 있다면」중에서
그리움도 사랑도 까마득한 옛일 되어버렸네 / 하지만 꽃 피는 봄, 초록 무성한 여름, / 홍엽紅葉의 가을, 눈 내리는 겨울 / 사물들은 수시로 나를 검문한다네 / 갓 낳은 새알처럼 / 두근거리는 감정을 벌써 잊었느냐고 ---「소년이었을 때 나는」중에서
한겨울 저녁 / 아궁이에 불을 땐 적이 있다. / 부엌문 틈새로 들어온 마파람이 / 등짝을 시리게 하면 / 아궁이에 바짝 다가섰다가 / 불의 손에 할퀴기도 하였다. / 불을 쬘 때는 거리가 필요하다. / 멀면 춥고 가까우면 델 수 있다. / 사랑이여, 서로를 쬘 때 이와 같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