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문제들은 단지 개인에게 관련될 뿐, 공동의 이해관계에는 관련되지 않는다. 이 생각은 특히 종교개혁 운동 속에서 발전하였다. 당시 신학자들은 은총과 구령 예정설을 강조함으로써 인간한테서 구원에 대한 지배력을 제거했다. 구원은 지상에서의 삶의 행위들과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각자는 진리에 관한 자신의 양심에 일치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천복의 문제는 더이상 집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 로크와 그 뒤를 이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에 따르면, 똘레랑스는 구원과 공익 사이의 구분에 기초한다. 국가는 "영혼의 구원"에는 신경쓸 필요가 없고 단지 세속의 행복, 즉 "삶, 자유, 신체보전, 고통으로부터의 보호, 외적 재산의 소유"를 보존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참된 종교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하느님과 피창조물 사이의 '사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배 행위에 따라 교단이 결정되는데, 이것은 사회 생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예배 행위들은 자유스러워야 한다. 오베르 드 베르세는 "종교에 대해 공언하는 자유는 세속 사회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세속 사회와는 무관하며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튀르고는 종교에 관해 똘레랑스가 당연히 요구되는 까닭은 각 개인의 이해관계가 구원과는 동떨어져 있으며, 따라서 구원에 관해서는 그 무엇으로도 이웃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pp.121~122
남의 견해를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나 자신 속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그만 둔다. 똘레랑스에는 자발적인 포기, 즉 '1인칭의 특권'의 포기가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박탈'에 관한 것이다. 빈곤화의 이지적인 해석, 나아가 신비적인 해석으로서, 똘레랑스는 영혼에서 진리가 박탈된 때의-에카르트 선생의 표현에 따르면-'무(無)에 대한 자유'를 수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거기에는 '초자연적일 수 있는 희생, 영웅적일 수 있는 무사무욕'이 있다.
이처럼 똘레랑스는 그 극한에서 부조리한 자아의 망각을 시인한다. 모든 안전과 모든 질서를 쉽게 잊어버리게 하는 이 무분별이 바로 똘레랑스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얀켈레비치는 '사랑할 능력이 없어서' 똘레랑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똘레랑스는 또한 사랑 그 자체 고유의 영웅주의로, 즉 '자아는 의무만 지니면서 남에게 모든 권리를 넘겨주는 양도운동'으로 간주되지 않는가? 인간에게 앵똘레랑을 보호하도록 이끌고 '자신의 패배를 만드는 당치 않은 사람'이 되도록 인도하는 이 비합리성은 우리들 눈에 하나의 절대적 아량으로 똘레랑스에 가치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그 가치 자체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증표라는 지위로서는 얼마나 위험스러운 것인가? 이런 면에서 볼 때, 똘레랑스는 하느님에 대한 헌납처럼, 무상이면서 자발적인 행위의 모든 특징을 보여줄 의무, 즉 기존의 어떤 질서나 어떤 유용성에도 의거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똘레랑스의 이 점 자체를 통하여, 똘레랑스는 악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의 증거로 세워진다.
--- p.22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