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의 눈빛이 호랑이의 눈빛과 얽히면서, 목덜미 뒤쪽에 소름이 돋았다. 한동안 세상 만물이 정지해버린 듯한 상태에서, 그는 호랑이가 본 것을 그대로 말해주는 목소리, 자신이 목소리를 들었다. '사랑이야.'
알렉스의 심장이 덜컥 무너져내렸다. '사랑.'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 자신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이기 시작한 감정의 정체는 바로 사랑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데이지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그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오고 있는지 데이지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계속 부정을 했던 것이다.
그는 데이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맹목적으로. 절대적으로. 어떻게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었을까? 데이지는 아주 오랫동안 그의 인생을 독차지했던 고대의 아이콘, 진귀한 예술품보다 훨씬 더 소중한 존재였다. 데이지와 함께 지내면서 그는 행복해지는 법을 배웠다. 기쁨과 열정, 그리고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겸허함을 배웠다. 그런데 그 대가로 자신은 데이지에게 무엇을 내주었던가?
--- pp. 419-420
두려움 대신 차분함이 몸에 스며들었다. 호랑이가 자신이 되고 자신이 호랑이가 되었을 때, 그녀는 고향에 돌아온 듯한 느낌, 전엔 느끼지 못했던 평화로움을 체험했다. 시간의 어느 한 파편 속에서 그녀는 삼라만상의 신비를 터득했다. 모든 생명체는 서로 다른 생명체의 일부였고, 신의 일부였으며, 사랑으로 묶여 있고, 서로를 보살피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그녀는 그때 두려움도, 질병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보다 더 중요한 존재는 없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듯, 하늘이 아닌 지상의 방식으로 알렉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310
데이지는 아버지를 뚫어져라 보았다.
"말도 안 돼요."
"사실이다, 데이지. 알렉스의 할아버지는 황제의 외아들이었던 알렉세이 로마노프야."
데이지는 니콜라이 2세의 아들인 알렉세이 로마노프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1918년 열 네 살이 되던 해, 알렉세이는 부모와 네 명의 여동생들과 함께 예카테린부르크이 어떤 농가 지하실에 끌려가서 볼셰비키들에게 처형되었다. 데이지는 그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했다.
"황실 가족은 모두 처형되었어요. 니콜라이 황제, 알렉산드라 황비, 그리과 황태자와 공주들 모두요, 1993년에 우랄 산맥 근처에서 유골이 발견됐잖아요. DNA테스트까지 거쳤어요."
아버지는 머그잔을 집어들었다.
"DNA 테스트로 황제, 알렉산드라, 그리고 공주 셋의 유골은 확인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아나스타샤 공주와 황태자 알렉세이의 유골은 찾지 못했ㅈ."
데이지는 그 말을 곧이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근 백년에 이르는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황제의 핏줄이라고 근거 없는 주장을 하지 않았던가. 대부분이 아나스타샤 공주라고 사칭하는 여자들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은 모두 사기꾼으로 치부하고 경멸했었다.그런데 아버지는 왜 황태자가 탈출했다고 믿는 걸까? 러시아 역사에 대한 집착이 너무 강해진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해버린 걸까?
--- p.302
데이지는 몸을 획 틀었고, 여전히 시바 앞에 서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알렉스를 보았다. 하지만 그의 무릎은 점점 구부러지고 있었다. 그 지엄한 로마노프의 무릎이. 그 자부심이 높은 마르코프의 무릎이. 천천히, 그는 톱밥 속에 무릎을 꿇었지만, 데이지의 눈에는 지금까지 지켜봤던 알렉스의 어떤 모습보다 오만하고 기개가 있어보였다.
[나한테 빌어] 시바가 속삭였다. [안돼요!] 데이지의 가슴속에서 그 말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신전을 위하는 길이라고는 해도, 시바가 알렉스에게 이런 짓을 하게 할 순 없었다! 호랑이를 위해서 다른 호랑이를 죽여야 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데이지는 공연장 안으로 뛰어들어서, 원형 무대의 톱밥을 사방에 날리며 알렉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는 그의 팔을 힘껏 위로 잡아당기며 일으켜 세우려고 애썼다.
[일어나요, 알렉스! 이러지 말아요, 시바가 하라는 대로 하지 말란 말이에요.] 알렉스는 시바 퀘스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눈동자가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아, 데이지. 나 자신 외에는 아무도 내 품위를 손상시킬 수 없어. ]
--- pp. 464-4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