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서 활약할 수 있는 사람이 피해 당사자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구체적인 말투, 표정, 행위 전후에 상대방이 한 행동, 당시 공간의 상황, 주변 사람들의 반응, 자신이 느낀 분위기 등을 세밀하게 되짚어봅시다. 피해자는 CSI 과학 수사대가 현장 검증을 하면서 단서를 찾아내고 사건 발생 시나리오를 더듬어가는 것보다 더욱 생생하고 풍부하게 당시 상황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가해자가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거짓말하거나 듬성듬성 자르거나 눙치고 생략해서 말하는 것을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는 단서가 그 안에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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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의 방향을 잡았다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해봅시다. 예를 들어 ‘가해자가 반성문을 써서 제출하게 하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싹싹 빌게 하자’, ‘합의금과 위자료로 피해 보상금 얼마를 내게 하자’,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자’, ‘휴학하게 하자’, ‘내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자’ 등 가해자에게 조치할 수 있는 목표도 가능합니다. ‘내 마음이 안정되고,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심리 상담을 받자’, ‘자조 모임에 참여해 비슷한 입장의 피해자들에게 힘을 얻자’ 등 나 자신을 위한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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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피해자가 가해자와 다시 접촉하는 것을 꺼립니다. 목소리도 듣기 싫고 꼴도 보기 싫어 통화를 피하거나 남은 증거를 지워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잡힌 현행범이나 목격자가 확실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건 해결 과정에서 피해를 입증하는 것은 피해자의 몫이 되고, 현실적으로 피해자 진술만으로 피해를 인정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이 힘들더라도 가해자와 관련된 대화 내용이나 기타 증거가 될 만한 것은 모두 남겨두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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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는 수사 기관에서 제출한 조서와 증거, 심문 과정을 검토하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되는데, 이때 피해자의 입장을 자세하게 전달할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은 탄원서와 진정서입니다. 특히 피해자의 참고인 법정 진술이 없는 한 재판부는 피해자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탄원서나 진정서가 유일한 수단인 셈이지요. 법정 진술을 하는 경우라도 발언 시간이 제한돼 있기 때문에, 현재 피해자가 겪고 있는 심적 고통이나 사회생활의 어려움, 후유증은 진정서를 통해 자세히 적고, 가해자가 거짓 증언을 하거나 잘못된 주장을 하는 경우 반박하는 내용 역시 상세하게 적어서 제출하면 효과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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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고용평등 및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라, 성희롱 피해를 입은 경우 지방노동사무소를 통해 3년 안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 관련 피해를 주장하거나 권리 구제 신청을 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해고, 휴직, 정직, 전직, 감봉, 기타 징벌 등 인사상 불이익 조치를 당했다면 3개월 안에 해당 지방 노동 관서나 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 p.128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성희롱은 아니었을 거야’, ‘나름대로 촉망받는 사원이니 잘 봐주려고 그런 건 아닐까’,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왜곡하거나 억누르지 마세요. 피해자가 느끼는 불쾌함과 불편함은 결코 잘못되거나 틀린 감정이 아닙니다. 사표를 내든 회사에 계속 다니든, 가해자와 한판 붙든 조용히 넘어가든, 피해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대응할 권리가 있습니다. 내가 느끼는 불쾌함을 제대로 살피고 잘 돌보는 것부터 성폭력에 맞서는 일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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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손가락을 성기에 넣은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는 다섯 살 아이에게는 ‘너의 성기(또는 보지, 짬지 등 성기를 지칭하는 정확한 단어)는 소중한 네 것인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막 함부로 만지고 하는 것은 나쁜 거야’라고 가해자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주고, ‘우리 ○○이가 잘 몰라서 아저씨 하지 마세요, 하고 말을 못했구나. 그래도 엄마한테 이야기를 해줘서 엄마가 빨리 알 수 있어서 다행이네’ 등의 말로 격려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 p.208
치유의 길에는 다 각자의 속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속도에 신경 쓰지 말고, 상처 받은 내가 잘 따라오고 있나 계속 주의를 기울이고 배려해야 합니다. 지치면 그냥 잠시 쉬어가도 됩니다. 재촉한다고 빨리 회복되는 것도 아닌데 조금 늦어지면 어때요.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충분히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최선을 다해보세요. 그리고 누구보다 나의 진솔한 친구가 돼주려고 노력해보세요. 더?기만 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저만큼 나아간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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