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 1946년 3월,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3,500톤급 구축함 요이즈키Yoizuki로 호주에 억류돼 있던 대만인과 한국인 전쟁 포로를 각각의 국가에 송환하기로 결정한다. 요이즈키 함의 적정 승선 인원은 800명이었지만, 연합군 최고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해 948명까지 탑승 인원을 승인했다. 그러나 실제로 요이즈키 함에 승선한 인원은 한국인 남성 전쟁 포로 156명 등 총 1,005명이었다. 맥아더의 승인보다 57명이 초과 승선한 것은 가족이 함께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인도적인 조치였다. 이렇게 요이즈키 함에 탑승한 전체 인원은 전쟁 포로 565명, 절반이 여성과 어린이로 구성된 피억류자 440명이었다. 전체 인원 중 여성은 98명, 어린이는 112명이었다.
---「전쟁의 시작_ 호주」중에서
드넓은 태평양의 모든 지역에서 싸울 수 없었던 연합군은 방비가 튼튼하고 병력이 집중된 섬은 우회하고, 상대적으로 방비가 약하되 지정학적으로 일본 본토에 접근이 유리한 섬을 주로 공략하는 ‘아일랜드 호핑(Island hopping)’ 작전을 시작했다. 일본 본토에 최대한 근접해 대규모로 전략적 공습을 개시하고, 잠수함으로 본토를 차단한 후 필요하다면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니미츠 제독의 주도로 태평양 중부에서 아일랜드 호핑이 시작되자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을 남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며 뉴기니에서 일본군 추격을 이어 갔다.,타라와 환초, 콰잘레인 환초와 에니웨톡 환초, 트럭섬, 사이판, 괌, 티니안, 펠렐리우, 레이테만, 필리핀, 이오지마, 오키나와가 아일랜드 호핑의 대상이었다.
---「아일랜드 호핑_ 아일랜드 호핑」중에서
“소풍 같은 작전이 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해병대 역사상 가장 피 튀기는 작전을 향해 직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착륙 몇 분 후에 찍힌 겁니다. 400야드를 밀고 나간 후 기력을 회복하려고 장병들은 해변을 끌어안고 있었죠. 24시간 작전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어요. 섬에는 일본군이 잔뜩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카메라는 진실을 말해 주지만 냄새가 어땠는지는 전혀 알려 주지 않아요. 그 섬에서는 악취가 났어요”
---「아일랜드 호핑_ 타라와」중에서
미군은 눈에 익숙지 않은 동양인이 신기하게 보였다. 사로잡은 일본인 포로와 덩치 큰 한국인 포로를 나란히 두고 비교하기도 했다. 이 사진에는 ‘거인 한국인’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두 명의 일본군과 그들보다 세 배 정도 큰 성인 한국인 비교. 첫 번째 일본군은 17세, 두 번째는 19세, 거인 한국인은 28세’라는 설명으로 미군이 이들을 얼마나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일랜드 호핑_ 오키나와 본섬」중에서
2021년, KBS 다큐멘터리 [태평양 전쟁의 한국인들] 방송이 끝난 후 김형석 PD는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영상에 잠깐 등장했던 사진 속 남성이 본인의 아버님이라는 시청자의 메시지였다. 제작진은 티니안 민간인 수용소의 한국인 사진을 방송하기로 결정했지만, 사진에 찍힌 개개인의 이야기를 다룰 수는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양상옥 님을 만나 아버님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방송 후에도 아쉬운 마음을 갖고 있던 제작진에게 사진 속 남성이 스스로 본인의 존재를 드러낸 것 같았다.
---「후일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