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상류 사회의 여인들은 영향력 있는 사교모임을 통해 폭넓은 인맥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돈과 재산을 미친 듯이 헌납해 왔다 이는 절대적인 신봉과 맹목적인 사랑에 대한 물리적인 표현이었다
--- 머리말 중에서
최후의 순간까지도 총통과 함께
패전의 현실이 명백해지고, 히틀러 주변의 여인들이 살길을 찾기 위해 베를린을 떠나갔지만 괴벨스와 막다는 끝까지 남아 나치 시대의 장엄한 몰락을 준비했다. 1945년 4월 22일, 히틀러는 선전장관 괴벨스와 '총력전 위원회의 위원들'에게 수상청사의 방공호로 옮겨올 것을 수락했다. 같은 날, 히틀러는 국민에게 악랄한 경고를 내렸다.
'명심하시오! 우리의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책략을 선전하거나 그에 동의하는 자는 모두가 반역자요! 이 같은 반역자들은 즉시 사살되거나 교살당할 것이오!'
--- p.244
전후에도 게르트루트는 나치의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 1974년, 게르트루트는 국민의 대표기관으로 의회만큼 부적합한 곳은 없다며, '우리(나치여성)는 보다 진보적이었다!' 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1978년, 그녀의 역할을 분석한 비판적인 기사가 보도되자, 게르트루트는 이에 대한 답으로 '제 3국의 여인'이란 책을 출간했다. 지난날의 연설과 글이 담긴 책에서 줄곧 총통을 찬양한 게르트루트는 제3제국을 옹호할 뿐 참회의 뜻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이 우리의 의식 속에 파고드는 날까지, 민족을 흔들어 깨운 전선의 병사가 어둠 속의 우리에게 빛을 보여줄 그 날까지...'
--- p.292-293
당시 히틀러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은 여성나치 엘리트그룹에 입문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었으며, 히틀러의 카리스마는 여성을 모멸하는 나치당의 정책을 망각하게 했다. 히틀러와 나치당은 여성을 모멸하는 정책을 폈지만, 히틀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려는 여성의 손길은 끊이질 않았다.
실제로, 여성은 재정을 지원하는 일반 당원으로서 대단히 환영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 이상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나치당의 이론가 로젠베르크가 공언한 말은 여성문제에 대한 나치당의 입장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한 가지만은 분명히 해둬야겠소. 재판, 군사 그리고 국정은 남성의 몫이고, 이 점은 앞으로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오!"
'여성해방으로부터의 여성해방'은 국가사회주의운동의 기본노선이었으며, 국사는 '남성의 몫'이었다. 1921년에 열린 당원총회는 '어떤 여성도... 당 지도부와 주요핵심위원회'에 영입될 수 없다는 원칙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당시 나치는 몰락해 가는 민족 및 인종의 수호와 문화보전을 당면과제로 삼았으며, 이런 과제를 여성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히틀러는 간단명료한 말로 이 문제를 일축했다.
"정치에 끼어 드는 계집들은 정말 밥맛이야! 1924년이었어. 정치를 하겠다는 여편네들이 내 집에 몰려왔었지. 트로이엔펠스의 마누라와 마틸데 폰 켐니츠(루덴도르프의 아내)였어. 글쎄, 제국의회 의원이 되고 싶다는 거야! 여자들이 군사문제를 다룬다고 생각해봐. 소름끼치지 않나! 지구당 사무실 어디에도 여자들에게 내줄 자리는 없다구.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여자들은 절대 안 돼! 분명히 말해두지만, 논의 대상의 99퍼센트는 여자들이 판단할 수 없는 남자들 일이라구..."
히틀러는 나치당의 대통령 후보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을 비롯하여 다수의 추종자들이 아내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정치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아내이자 여의사인 마틸데 루덴도르프는 선동적인 글들을 집필했을 뿐 아니라, 부부관계에서도 주도권을 휘어잡은 여장부였다.
--- pp.16-17
4월 28일 자정을 바로 앞두고 평생 소원을 이룬 에바는 아침에 아돌프 히틀러의 신부가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 증인은 괴벨스와 보어만이었다. 에바는 목까지 올라온 긴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장신구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몸을 치장했다.
--- p.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