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최악의 상황에 대해서 나는 아직 아무 이야기도 꺼내지 않았다. 즉 털 말이다. 두 다리에, 심지어 등에까지 가늘고 긴 털들이, 어떤 제모 크림을 발라도 소용이 없는 반투명하고도 단단한 털들이 돋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는 수없이 나는 몰래 오노레의 면도칼을 이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나는 다시 털복숭이가 되곤 하였다. 손님들은 별로 반기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몇 명의 단골들은 우스꽝스럽게도 나만을 고집했다. 이들은 언제나 나를 네 발로 기어다니게 했고, 내 몸의 냄새를 맡으며 혀로 핥았고, 발정기에 접어든 수사슴같이 소리를 질러 대며 그 짓거리들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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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마리 돼지가 들어와 내 냄새를 맡았다. 순하기만 한 덩치 큰 게세된 수퇘지들이었다. 암퇘지도 한마리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입을 삐죽거리며 한쪽으로 가버렸다. 텁텁하고 강렬한 냄새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고 나는 말하자면 속으로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거대하고 순한 살덩이들에 둘러싸여 나는 내 살덩이 속으로 움츠러들었다. 그 냄새는 도처에서 밀려왔다. 내 몸의 부드러운 바닥으로부터도 왔다. 나는 말하자면 다시 나의 짐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어머니가 사료를 주려고 우리 안으로 들어섰을 때나는 몸을 움찔했다.
--- p.178
1954년 사강의 책이 나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19세였다. 당시 프랑스 문학계의 대가로 군림하고 있던 프랑수아 모리악은 사강을 가리켜 <매혹적인 작은 괴물>이라고 부르며 주인공 세실에게서 젊은 계층의 슬픔을 느꼈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암퇘지'의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는 당시의 사강보다 여덟 살이 위인 스물일곱 살이다.
대입 예비고사에서 낙방한 사강이 끼적끼적 써본 것이 '슬픔이여, 안녕'이라면, '암퇘지'는 프랑스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고등 사범학교 출신으로 대학 강사이기도 한 작가가 마음먹고 쓴 소설이다. 하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리 다리외세크와 사강을 함께 떠올리게 되는 것은, 새로움에 목말라하는 프랑스 문학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두 작품이 상징적으로 일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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