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행복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김희조 (문학 MD /rarity@yes24.com)
2013-06-12
한 권을 읽었는데 여러 권을 읽은 묘한 느낌이 든다는 함민복 시인의 칭찬이 책장을 넘겨보도록 부추겼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던 저자는 역설적으로 이것저것 하는 것이 꽤 많았다. 시인이자 건축가이면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하고 각 분야 평론가로도 활동하는 동시에, 제주 강정에 돈 안 되는 도서관을 짓고, 화가들과 어울려 그림을 그리고, 영화판과 공연, 전시 기획에 참견하고, 만화를 향한 연심도 책 한 권은 족히 넘는다고. 이렇게 공사다망한 중에도 틈틈히 친구들과 술을 마신단다. (이야…)
세상 모든 것들이 나의 텍스트들이며, 나는 잡식성의 괴물이 되는 것이다. 사실, 내가 배운 모든 것들의 팔 할은 만화당(만화방이 아니라 그때 우리는, 만화당이라고 불렀다)에서였고, 일 할은 여성지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잡지였으며, 나머지 일 할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매혹적인 건축물들에서였다. - 본문 중에서
이렇듯 건축, 음악, 미술, 만화, 여행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지식들이 독특한 카툰과 잘 어우러진 책. 그의 관심사가 넓다고 해서 그의 이야기의 깊이가 얕을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하는 건 오산이다. 이 아이러니한 제목에는 그 동안 ‘자본주의가 갖고 있는 욕망의 속성’을 비판해온 시인으로서의 삶의 철학이 오롯이 담겨 있다.
삶의 최소주의를 말할 때는, 건축가답게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집을 지을 때 지켰던 ‘삼칸지제(三間之制)’ 덕목을 예로 든다. 세 칸 아홉 평 남짓한 공간 안에서 삶과 생활을 만들어 갔던 옛사람들에 비해, 모든 것이 남아서 문제인 세상에 살고 있는 오늘의 우리. 그리고 ‘있으면 좋을 것들’에 치여서 정작 ‘꼭 필요한 것들’이 제 자리를 잃고 마는 지금의 세상.
“그래서 네 생각은 뭔데?” “사르트르에 의하면…”
그러니까 ‘너의 생각을 말해봐!’ 란 것이다. 책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주지는 않는다. 단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제공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분석하고 종합해내서 자신의 생각을 말하게 하는 것은 다른 배움에서 온다. 늘 우리 곁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들, 도심의 거리에서, 숲에서, 집에서, 휴양지에서, 일터에서, 이로운 것들과 해로운 것들의 행간에서, 좌절과 희망의 순간순간 속에서 얻어지는 결코 거창하지 않은 사소한 깨달음들. 이 일상적인 삶의 순간 속에서 그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한 권의 책이 지니고 있는 생의 무게를 끝까지 알지 못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풍요로운 세상에서 한껏 편리함을 누리면서 살고 있지만, 때로는 무차별적이고 몰개성한 삶을 강요당하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에 행복과 자유를 침해 당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이 폭넓은 '오지래퍼' 의 거침없는 이야기 사이사이에서 유영하며 그저 마음 가는대로 살기, 아무 것도 하지 않기의 자유를 잠시나마 만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