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마르크스주의자로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치적 견해를 규정하는 것인 반면, 누군가를 마키아벨리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의 인성에 대한 판단으로 들린다. 마키아벨리는 확실히 세계 최초의 냉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모종의 파렴치함과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었기 때문에 능숙하고 이기적인 모든 행위는 이제 마키아벨리적인 행위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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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에서 중세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발전한 통치형태는 공화정이었다. 잦은 선거와 서로 겹치는 여러 가지 사법권은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역동적인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참정권은 부유한 상인들과 보다 중도적인 장인들에게만 허락되었다. 비록 도시의 일반 대중은 정치 분야에서 일체의 역할이 배제되었지만, 당시 피렌체는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민주적인 국가였다. 마키아벨리의 청춘기 내내 피렌체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것은 단 하나의 가문, 어마어마한 부를 자랑한 메디치 가문과 그 추종자들이었다. 따라서 본인들에게도 통치의 자격이 있다고 여긴 다른 집안사람들은 불만을 나타냈고, 이따금 폭력사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메디치 가문이 실질적인 정치적 발언권을 상실한 시민들을 달래는 한 가지 방법은 도시의 번영과 화려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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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의 진정한 아들이었다. 그는 창의성이 꽃피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시대의 가치 기준과 병리현상의 산물이었다. 그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윤리적인 시각과 거리를 둘 수 있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혼란 상태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초반의 이탈리아에서는 숱한 권력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졌다. 승리를 거둔 군대는 금세 패배를 맛봤고, 외부 세력의 공격과 내부적 반목에 시달리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그런 가장 극명한 현장이 바로 피렌체였다. 피렌체의 역사는 파벌 간 분쟁과 정치적 동요로 점철된 유혈의 역사였다. 정부가 무너지고, 적군이 마을을 불태우고, 농토를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고, 강간과 살인을 자행하는 상황에서 이상적 국가에 대해 차분하게 숙고한다는 것은 사치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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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의 궁정에 자리를 잡지 못한 데는 그의 예민한 성격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친구가 부족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친구들은 마키아벨리가 스스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몇 년 뒤, 마키아벨리가 공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 친구인 비아조 부오나코르시는 그가 동료들을 멀리하지 않도록 나서야 했다. 평생 동안 그는 윗사람들에게 아부를 떨 줄 몰랐는데, 그의 그런 결점은 뛰어난 재주보다 비굴한 아첨을 더 좋아하는 군주들이 『군주론』의 헌정을 거절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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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최고의 격동기에 피렌체 정부에서 일했던 경험은 마키아벨리에게 이상적인 교육의 기회가 되었다. 그 경험은 그의 눈이 트이고 정신이 단단해지도록 이끈 역경의 학교였다. 거기서 그는 현실 정치에 관한 수많은 실용적 교훈을 배웠고, 가끔 거둔 승리뿐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자주 겪은 패배를 통해서도 교훈을 얻었다. 『군주론』과 『전술론』에 이르는 마키아벨리의 여러 저작은 군사적 사안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그는 국가가 스스로를 확실히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적절한 통치 형태를 논의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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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Borgia, 즉 스페인 태생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7대 죄악 가운데 대부분을 저지르고 살았다. 탐욕, 분노, 정욕, 대식, 오만 등은 그가 최대한도 이상으로 지닌 악덕이었다. 마치 그는 붉은 황소의 모습이 돋보이는 보르자 가문의 문장을 본보기로 삼은 사람 같았다.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였으면서도 더 어리석었던 전임 교황들과 달리 로드리고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 대신 마음껏 탐닉하면서 성적 능력과 엄청난 식욕을 뽐냈다. 1501년 7월, 마키아벨리의 친구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가 로마에서 보내온 보고서에는 교황의 비행이 열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성직록聖職祿이 멜론처럼 팔리고 있어. 매일 저녁, 기도 시간부터 일몰 후 1시간까지, 스물다섯 명이 넘는 여자들이 궁전으로 들어간다네. …… (바티칸) 궁전 전체가 온갖 음탕한 것으로 가득한 매음굴로 바뀔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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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사절로 파견된 것은 유럽의 권력 중심지 내부를 현장에서 관찰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국왕과 그의 측근들에게 애원하는 동안 여생 내내 간직하게 될, 그리고 자신의 정치철학을 형성하게 될 교훈을 얻었다. 아마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교훈은, 아무리 거창한 웅변에도 불구하고 한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그런 장소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요소는 ‘힘’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가진 자는 세상을 호령했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동정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데, 동정은 뛰어난 자가 불운한 자에 주는, 쓸모없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인 선물이었다.
프랑스에 체류하는 동안 마키아벨리는 흥정에서 강자의 위치에 서지 못할 바에는 아예 흥정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점을 배웠다. 사자와 양의 거래에 비유되는 그런 모든 거래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집어삼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군주론』에서 그는 “무기를 든 자와 무기를 들지 않은 자 사이에는 합당한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무기를 든 자가 그렇지 않은 자에게 스스로 복종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했다.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조르는 상태에서 양심이나 공정한 태도에 호소한들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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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에게 품은 존경심은 이성의 산물인 동시에 감정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아찔하고 경솔한 사춘기 여학생의 짝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문약한 사람들이 종종 정력적인 활동가들에게 품는 흠모의 감정과도 비슷했다. 마키아벨리는 발렌티노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를 거의 취하지 않았으며 이 태도는 그로부터 불과 몇 년 후, 발렌티노의 급작스런 추락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 사내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이 분명했다. 마키아벨리의 마음은 아마 이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 진짜 사나이가 있다!” 그의 단점이 무엇이었든 간에 보르자는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고, 대범함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자신보다 더 많은 수단과 자원을 보유한 여러 국가에게 치욕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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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파장을 일으킨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군주론』도 이 책이 거둔 성공의 제물이 되었다. 이 책에 담긴 여러 가지 독창적인 통찰은 이제 진부하게 느껴진다. 마키아벨리가 당대의 정설에 맞서 벌인 여러 번의 전투는 이제 대수롭지 않아 보인다. 그가 적들을 확실하게 무찔렀기 때문이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탐험가처럼 마키아벨리도 실수를 저질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은 그의 실수를 포착해 교정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가장 통렬하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가 간략하게 그린 미완성 지도의 덕을 봤다. 16세기 이탈리아의 혼란스러운 지정학적 배경에서 탄생한 작품을 오늘날의 독자들도 즐겁게 읽고 훌륭한 참고자료로 삼는다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저술가적 재능과 인간적 동기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력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 p. 279
플라톤에 의하면 정치학은 “사람들을 선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식의 설명을 거부한다. 마키아벨리의 주장에 따르면 정치학의 유일한 역할은 현실 속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학들 또한 큰 뜻을 품은 군주에게 통치 요령을 가르쳐주는 것을 책무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을 하찮거나 비도덕적인 일로 여겼다. 그들의 저작은 추상적인 훌륭한 통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숙고하는 차원에 머물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후학들이 파고든 주제는 권력이 아니라 정의였는데 마키아벨리가 볼 때 그것은 무의미한 지적 활동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힘이 없으면 정의의 구현은 물론이고 그 어떤 것도 백성에게 베풀어줄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 p. 281
마키아벨리는 특정 이념을 선전하지 않았기에 서로 다투는 두진영 모두 부담 없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17세기에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프랑스혁명이 “민주적 폭정”이라는 이유로 “마키아벨리식 정책의 혐오스러운 원리”라고 비난했는가 하면, 그로부터 100여 년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마키아벨리식 정책”이 반혁명적 반동이라고 주장했다.
--- p. 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