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의철학의 건강 개념 연구들이 공통으로 문제 삼는 지점은 세계보건기구의 건강 정의이다. 비판 지점은 첫째, 그것이 완벽하기에 이상적인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이 정적인 상태로서 존재 관념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계보건기구의 건강 정의에 의거할 때, 완벽하기에 이상적인 건강 상태가 정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정의가 왜 문제인가? 그것이 건강을 성취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의 상태에 대한 매우 특수한 개념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인류 일반이 성취해야 할 것으로 보편적 개념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지성(intelligence) 대신에 전지성(omniscience)을 제시한 것으로 인류 일반이 지성이 아니라 전지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같다. 이는 결국 모든 인간이 의료서비스에 종속되어야만 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건강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일과 같다. 또한 인간의 몸은 역동적 시스템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성취해야 할 정적 상태를 도입함으로써 개념적 충돌을 일으킨다. 만일 그와 같다면, 인간의 몸은 건강 상태를 성취함과 동시에 역동적 시스템으로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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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현재까지 온정주의와 공동체의 결정을 중시하는 경향으로부터 자기결정권, 개인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이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감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방역은 다시 모두의 건강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해야 하는 윤리적 갈등 상황을 초래한다. 온정주의, 방역, 공중보건, 자기결정권, 자율성 등 의료윤리의 고전적인 주제들은 이 팬데믹을 계기로 새롭게 조명될 것이다. 또한 팬데믹으로 1년 반 넘게 죽음과 질병, 고통이 나와 내 가족에게, 혹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공유하면서 의철학의 고전적인 주제인 인간, 삶과 죽음, 질병과 고통은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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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내에서 영미 철학 전통의 의철학 연구가 매우 제한된 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진행되는 이유 중 하나로 현재 영미권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들이 많은 경우 프랑스 학계에서 적어도 한 번씩은 이미 다루어졌던 문제라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과거에 없던 새로운 자료들과 방법론들이 논의를 새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논의들이 주장하는 바는 영미권의 의철학적 논의들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논의되었던 주제들이다. 현재 이루어지는 논의들이 의미 없는 반복일 뿐이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다만 이미 다루어졌던 문제이기에 크게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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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철학의 현상학적 탐구 동향의 특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현상학적 질병 이해가 삼인칭 관점에서만 이해되는 익숙한 질병관을 다시 살피게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현상학적 질병 이해는 일인칭의 관점도 함께 고찰할 것을 주문한다. 그러한 사정에 따라 의료 영역의 현상학적 이해는 돌봄이 의료와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는 이유를 제공한다. 왜냐하면 앞서 논의한 것처럼, 질병은 신체(몸)의 상호 주관적 관계에서, 즉 ‘할 수 있음’이라는 사태 속에서 살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주관적 관계는 ‘나’와 ‘너’를 배제한 ‘그것’만이 강조되는 사태를 거부한다. 한마디로 의철학의 현상학적 동향에서 툼스·스베너스·카렐은 체험의 질을 통한 질병 이해를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물리적·환원주의적 방식만으로 이해되던 질병관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비판적으로 보완한다. 이들은 물리적·환원주의적 방식도 중요하지만, 이와 함께 질적 이해를 동반한 이해 방식도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질적 이해는 개별 환자들을 향한 사람 중심의 의료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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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시대에 응용윤리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기술과의 친밀성이다. 인공지능윤리, 의료윤리, 환경윤리, 생명윤리와 같이 나름 응용윤리학에서 주류인 학문들은 기술 환경 속에서 논의할 수밖에 없다. 기술로 점철된 환경 속에서 기술윤리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주로 개발자들이 진지한 고민 없이 사용하는 용어로 인한 문제, 학제 간 연구의 어려움, 환경이 된 기술, 현실에서의 기술 의존도와 학문에서의 기술에 대한 비판의 괴리 등이다.
과거와는 달리 그 영향력이 크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인문학자들에게 기술 관련 연구는 쉽지 않다. 또한 현실에서는 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강압이 있고, 연구 분야에서는 기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태생적으로 품고 있는 기술윤리 연구자들이 처한 모순된 상황이 이념은 아름다우나 실천과는 괴리되는 공허한 양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술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든 간에 기술윤리 연구는 기술과 견고한 연결 속에서 이루어지고 어떤 학자들은 융합 연구라는 곳으로 안개에 싸인 길을 제대로 정비된 무기 없이 걸어 나서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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