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넨 너무 뚱뚱해.”
뭐라고?!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었다. 나한테, 지금, 누가, 대놓고 살쪘다고 말했다? 씁쓸한 현실감의 구름이 그날의 좋았던 기분 위로 강하게 몰려왔다. 울컥하고 올라오는 무거운 우울감. 그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몸속 피가 싸늘하게 식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누가 나한테 뚱뚱하다고 한 건지 보니, 어떤 한국인 ‘할머니’였다.
---「1부 내가 그 할머니를 만났을 때」중에서
나는 그 질문들에 조리 있게 대답했고, 이 말에 다시 한번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달리기는 청바지에 내 몸을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꿈에 나 자신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어요.”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 에이즈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기 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게스트 중 한 사람인 마이클 벡위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입모양으로 “당신이 해냈네요”라고 해주었다. 내 말은 그렇게 끝났고, 나는 제자리에 앉았다. 윈프리 여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앉지 마세요. 이리 올라오세요. 먼길을 달려 오셨잖아요.”
---「1부 내가 그 할머니를 만났을 때」중에서
나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을 하며 여러 도전에 뛰어들던 중이었다. 당시 엔터테인먼트를 향한 내 열정은 에이즈와 싸우고 싶다는 내 소명과 섞여 있었다. 뉴욕대와 UN, MTV가 협력한 ‘The New York AIDS Film Festival’에서는 내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 나는 불행한 싱글이었고, 뚱뚱하고, 외로웠지만…. 그렇지만 제법 유명해지고 있었다. 빙고! 하지만 미국의 유명인, 사회운동가, 외교관들과 서로 연락처를 공유하는 이름난 여성이라는 사실은, 내 개인적인 성장과 전혀 무관했다. 최고의 디너 파티에 참석하든, 내가 그 파티를 열든 내 근본적인 외로움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1부 내가 그 할머니를 만났을 때」중에서
그리고 다음 순간, 그분과 나는 한아름 마트라는 한인 마트 앞에 있었다. 요즘은 ‘H 마트’라고 불리는데, 미국 전역과 캐나다, 영국에도 체인이 있다. 마트 안은 한국 상표의 식품들이 선반마다 가득 진열돼 있다. 널찍한 농산물 코너에는 한국 과일과 채소가 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보통의 대형 할인마트와 똑같다. 그곳에 들어가자고 내 옆의 나이 든 여성은 손짓한 다음, 나를 그 한인 마트 안으로 인도했다. 할머니는 카트를 직접 끌며 식재료들을 숱하게 가리켰다
---「1부 내가 그 할머니를 만났을 때」중에서
첫 달에는 13킬로그램 정도가 빠졌고, 1년 만에 50킬로그램이 빠졌다. 할머니가 “아니, 너무 말라가잖아. 더 먹어”라고 한 것을 기억한다. 정말 내가 살이 빠졌구나, 하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그날 내가 눈물을 보이자, 할머니는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재밌는 종달새 같던 할머니. 우리가 같이 장을 보던 정겨운 시간들. 나는 매주 내 것과 함께 할머니의 장바구니를 하나 더 꾸려 선물했다. 생채소만으로도 오래 다이어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한식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내 구원자였고 한식은 내가 평생 먹어야 할 음식이 되었다. 한식은 더 이상 다이어트를 위한 음식이 아니다. 한식은 나의 인생 푸드였다
---「1부 내가 그 할머니를 만났을 때」중에서
킴 카다시안과 카알라 디벨로는 그날 저녁 친절하게도 나를 환대해주었다. 킴 카다시안은 자신의 블로그에 내 달리기와 미션에 대한 글을 올렸다. 프로덕트 레드의 대표 탬신 스미스 씨도 있었고, 그 외에 수많은 스타들이 그 저녁 파티에 참석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 내가 그 한국인을 만났을 때」중에서
당시 내 파트너였던 컨버스(Converse)사는 스니커즈를 제공해주었다. 컨버스는 판매 수익금을 에이즈와 싸우는 데 사용하는 회사였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내 드레스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도록 나는 내 컨버스 스니커즈를 볼 수 있게 발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무심하던 카메라 기자단들이 내 신발에 환호를 질렀다.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그 부조화가 나름 재밌었다.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많은 사람이 내가 편한 신발을 신은 것에 칭찬을 보내주었다.
---「2부 내가 그 한국인을 만났을 때」중에서
배민이를 낳고 두 달 뒤, 산후 갑상선염을 다시 앓았다.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좋은 스트레스 또한 스트레스였다. 우리 인생이 행복하고 복이 넘쳐도, 키우던 반려견이 죽거나 직장을 잃는 정도만 스트레스로 여기고 나머지는 무심코 넘겨도, 우리의 몸은 모든 일에 대해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순조롭게 잘 대처해내고 있다고 해도, 좋은 스트레스도 여전히 스트레스다.
---「2부 내가 그 한국인을 만났을 때」중에서
다 같이 함께 우리는 ‘K-mommy’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었다. 한국인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모임으로, 아이가 몇 퍼센트 한국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이라도 한국인이거나, 한국인 부모로부터 태어났다면 우리 모임에 들어올 수 있다. 환상적인 마법의 힘을 지닌 우리 모임의 엄마들은 마음만 먹으면 세상도 바꿀 수 있다. 인종이 달라도 우리가 서로 소통한다면, 세상은 반드시 바뀌기 때문이다. 진짜다, 두고 보시라!
---「2부 내가 그 한국인을 만났을 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