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인 종교 경험은 당신이 무엇을 단순히 알기보다 그것을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데도 그것이 더 진정한 앎으로 느껴진다. 이 새로운 종류의 앎을 가리켜 관상, 비이원적 사고 또는 제3의 눈으로 봄이라고들 한다. 그런 기도, 그런 봄이 당신 혼자서 그것을 표현하거나 그 형상화가 옳아야 한다는 걱정을 덜어 준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연적 인식”이라 불렀고 둔스 스코투스는 “직관적 인식”이라 불렀다. 그것은 이성으로만 아는 것보다 순수한 앎이다.
--- p.24
성경은 갈등을 통하여 인간의 경험을 조명한다. 성경은 인간의 경험을 대변하는 책이 아니다. 갈등 자체로 초대하는 것이다. 어떤 본문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갈등을 통하여, 특히 하느님이나 성스러운 본문들과의 갈등을 통하여 의식이 깨어난다. 만일 우리가 온갖 투쟁과 딜레마, 패러독스, 부조리, 충돌을 피한다면 거의 아무 의식도 없이 살게 될 것이다.
--- p.32
우리가 무슨 수련을 많이 해서 하느님을 모실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존재 가치를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이 거기 계심을 아는 것은 그냥 알아차림의 문제다. 현재 순간을 허용하고 그것을 즐기는 문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순리적으로 일어나는, 우리가 궤도에서 벗어나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때 삶이 제대로 돌아간다. 한 번 우리가 우리 자신인 이 작은 흙덩이 안에서라도, 우리가 처한 이 짧은 순간에라도 여기에서 그 신비를 보고 그 신비를 신뢰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한테서도 그리고 마침내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도 그것을 보게 된다.
--- p.93
한 인형에 여러 인형이 들어 있는 러시아 인형을 그려 보라. 첫 번째 인형과 마지막 인형이 모두 요한묵시록 22장 13절에 등장하는 역사의 “알파이며 오메가”인 그리스도의 신비다. 마지막에 하느님이 그 모든 것을,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콜로 1,16)을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로 모으실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이거나 인간중심적인 구원이 아니다. 내 눈에 바오로 신학의 알속으로 보이는 로마서 8장 18-39절에서 정확하게 말하듯이, 그것은 모든 피조물한테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이른바 진화론에 맞서 싸우느라고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것은 우주적 그리스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와 예수가 너무나도 좁고 작았다.
--- p.164
그리스도는 나자렛 예수보다 더 크고, 더 먼저고, 더 오랜 분이시다. 하지만 예수님의 위대한 사랑과 용기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순종이 당신의 예수(.his Jesus)를 놓게 하였고 마침내 그리스도로 부활하시어 압도적 승리 안에 우리 모두를 품고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방인, 힌두교도, 아브라함, 사라가 모두 영원한 그리스도 신비의 부분이다. 외람돼 보이는 내 말을 용서하시라. 그래도 반복한다. 이것이 중요한 요점이다!
--- p.253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아무것도 아님이 실은 우리가 갈망하는 보물이고 자유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쁨과 영광으로 그것이 계시되었다. 우리는 입증하거나 보호할 무엇이 하나도 없는 공간, 하느님의 마음과 가슴 속에서 내가 나인 곳, 그것으로써 충분히 넉넉한 공간을 갈망한다. 영성은 어떻게 시간 이전의 벌거숭이로 돌아가서 하느님이 본디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게 해 드릴 것인지 그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 p.366
당신이 관상으로 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현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성찬례에서 예수님을, 다른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그렇게 다른 어떤 현존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다. 변화는 전적으로 그리고 언제나 당신한테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현존하신다. 예수님이 과연 어떻게 빵과 포도주에 현존하시는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다. 단순하게 당신을 현존시켜라. 그러면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당신 쪽에서 당신이 혼자 해야 하는 굴복하고 현존하는 실습이다.
--- p.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