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으로써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찬란한 봄날이 찾아왔다」중에서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 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주님의 부재와 현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내면에, 우리 공동체에 활발히 현존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기쁨과 희망, 따스함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자상하고 친절한 낚시 오빠」중에서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과 마주 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 메시아, 한잔 술에 기분이 좋아져 죄인인 인간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하고 노래 부르는 메시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메시아…. 우리의 하느님은 이처럼 따뜻하고 친근한 분이십니다. 우리와 멀찍이 떨어져 계신 분이 아니라 키 작은 우리를 위해 당신 키를 낮추신 분입니다. 우리가 낯설어할까 봐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신 겸손의 메시아이십니다.
---「먹보요 술꾼인 친구」중에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로 시선을 고정시켰을 때, 용감하고 당당하게 물 위를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선을 떨어뜨려 깊은 물속을 바라본 순간, 폭풍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우리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선이 주님을 향할 때 강건해집니다. 주님만 바라볼 때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 퐁당 사건」중에서
미국 현대 문학의 효시이자 대부인 동시에 탁월한 정치 사회 비평가였던 마크 트웨인(Mark Twain, 1835-1910년)은 칭찬의 탁월한 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칭찬 한마디에 나는 두 달을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칭찬은 듣는 이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 될 것입니다. 칭찬은 받는 사람의 마음을 넓혀 주고, 마음속에 새로운 불꽃이 솟아오르게 하며, 열정과 기쁨의 풍토를 마련해 줍니다.
---「칭찬의 달인」중에서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 마음 하나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아무리 몹쓸 짓을 했다 할지라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께선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중에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이뤄 내야 할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제대로 한번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제대로 그분의 실체와 대면하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통곡은 찬미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죽음의 씨앗은 생명의 씨앗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날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기만 한다면, 그날 이후로 우리의 인생은 기후 변화, 계절 변화에 상관없이 날마다 꽃이 피는 봄날일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꽃길만 걸으세요」중에서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빵이 아니라 영혼의 눈, 마음의 눈을 뜨려는 노력입니다. 그런 노력을 통해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영안靈眼이 뜨이면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큰 은총과 축복이 있습니다. 혹독한 고통이 견딜 만해집니다. 나의 깊은 상처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나와 참으로 다른 그가 선물로 다가옵니다.
---「말귀 알아듣는 귀」중에서
사랑이 지닌 속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역동성이 아닐까 합니다. 참사랑은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극진히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동료들을 향해 활기차게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 대해 우리 마음이 냉담하다면 그 사랑은 거짓 사랑에 불과합니다.
---「또 다른 착한 사마리아인」중에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교회에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어떻게 성전을 정화시켜야 할까 고민해 봅니다. 우리끼리만 모이는 폐쇄적인 교회가 아니라 춥고 고달픈 세상 사람들을 향해 활짝 열린 교회가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전 정화 작업이 아닐까요? 한 사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좌지우지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와 구성원 상호 간에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교회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성전 정화가 아닐까요?
---「분노와 슬픔이 가득한 성전 정화」중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 제자들의 권력욕 위에 당신의 무력한 사랑에서 흘러나온 새로운 권위를 쏟아부으셨습니다. 제자들의 욕망 위에 당신의 한없는 사랑을, 제자들이 분열된 자아 위에 당신의 영과 삶 전체를 쏟아부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세족례로 인해 이제 칼과 창, 힘과 권력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사랑만이 전부입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사랑만이 인간을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진흙덩이 발 불덩이 손」중에서
주먹을 사용하는 일은 아주 가깝고도 쉽습니다. 그러나 주먹은 또 다른 주먹을 불러옵니다. 결국 나도 죽고 상대방도 죽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임금, 힘의 논리에 의존하는 임금이 절대 아니셨습니다. 거듭되는 폭력과 압제, 비인간화 앞에서도 끝까지 견뎌 내고, 끝까지 용서하며, 박해자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은 사랑의 임금이셨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가 닮아 가야 할 참임금이십니다.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중에서
예수님 시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름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상류층, 지식층에 속했고 그러다 보니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가고 쓸데없는 우월감에 젖어 들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사정없이 혼쭐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던지는 말씀에는 너무나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어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면전에 두고 격한 말씀도 서슴지 않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 23,1-36 참조).
---「손도 씻고 마음도 씻어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