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수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었으며, 수많은 가정에 먹구름이 드리웠습니다. 온 나라가 비탄에 빠졌습니다. 며칠 전 너무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소년이 코로나바이러스로 할머니를 잃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까지 잃었습니다. 소년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다음 차례는 누구일까요? 아빠일까요 아니면 나일까요?”
---「프롤로그」중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의 대체물로 어린 양이 준비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어린 양이 수풀에 걸린 채 거기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 갈보리 언덕길을 걷길 고대하실 때, 마지막 순간에 형 집행이 정지되는 반전은 없으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의 대체물이 준비되지는 않을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의 대체물로 기꺼이 내어놓으셨습니다. 이상하게도 아브라함의 말처럼 하나님은 번제할 어린 양, 곧 ‘내 아들’을 친히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성자의 순종이 지불한 값이었습니다. 이것이 성부의 사랑이 지불한 값이었습니다. 성부도 성자도 최종 시험에서 발을 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 시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걷기」중에서?
룻기 1장이 제시하는 한 메시지는 우리에게 이 부분에서 정직하라고 촉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이미 아시며 우리가 내뱉지 않은 말도 들으십니다. 나오미는 시편 저자들과 예레미야와 욥이 보였던 정직함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고난을 벗어나는 탈출구일 뿐이며 우리가 버티도록 돕는 가상의 목발일 뿐이라고 말하는 냉소가들을 믿지 마십시오. 그리고 믿으면 고난과 가난이 사라진다는 번영 복음의 거짓말에도 속지 마십시오.
---「나오미와 룻, 비번영의 복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중에서?
하나님의 종들이 무거운 압박감에 탈진해 겪는 영적 우울증에 흔히 동반되는 요소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전체 그림 중에 일부만, 그것도 대개 가장 안 좋은 부분만 봅니다. 우리는 사실을 잘못 선택하거나 몇몇 사실을 왜곡하고 과장합니다. 우리는 원근이나 비례를 무시한 채 상황을 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상상이 얼마간 진실을 담고 있을 테지만, 모두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해롭고 우울한 생각의 늪에 빠져들 때, 때로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를 한쪽으로 끌어내 다시금 그분의 눈으로 현실을 보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엘리야에게 이렇게 하셨습니다.
---「엘리야, 우울증과 두려움의 치유」중에서?
분명 코헬렛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숙고하며 취했던 허무주의적 숙명론에서 건강한 기회주의로 옮겨 갔습니다. 그는 처음에 염세주의적 분위기에 젖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뭐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라며 불평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일어나 뭔가 하자”며 우리를 독려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몫은, 그게 무엇이든 기도하며 계획하고 실행할 능력이 있는 ‘배에 싣기’(shipping, 1절)와 ‘씨 뿌리기’(6절)를 하고 결과와 수확은 그분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코헬렛, 어처구니없는 세상과 하나님의 주권」중에서?
문제는 자기연민이라는 감정이 우리로 하여금 다음처럼 느끼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나 빼고 모든 사람이 회개해야 해! 난 희생자일 뿐이야. 나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자기연민을 회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연민은 꽤나 아늑한 감정이며, 일종의 거짓된 편안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연민에 파묻혀 잠시 그 감정을 즐길 수 있겠지만 그러면 주변 사람이 모두 비참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함정입니다. 자기연민은 또 하나의 죄악된 자기중심성이 되고 또한 일종의 속박이 되어 건강하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자기연민의 촉수들이 우리를 에워쌀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회개만이 그 촉수들을 잘라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환멸과 원망과 자기연민의 치유」중에서?
바룩은 왕궁에서 둘 이상의 왕을 섬긴 녹봉이 넉넉한 고위 관리였거나 그럴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선가 바룩은 예레미야 예언자 곁에 있기로 선택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왕궁에서 말 그대로 인기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룩은 왕 대신 예레미야를 섬기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룩은 자신이 맡도록 훈련받은 고위 비서관 직무를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의 글쓰기 재능을 한 예언자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 예언자는 왕과 예루살렘 엘리트 계층에게 매우 쓴소리를 내뱉기 일쑤였지만 말입니다.
---「바룩, 야망이 좌절되는 아픔」중에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된 일인지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자신이 실패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성공한 척하기가 교회 안에서 신뢰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입니다. 분명히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뿐 아니라 이어지는 여정의 발걸음마다 은혜는 우리 삶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지 않나요?
---「베드로, 실패와 죄책감의 치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