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은 1918년을 주도하던 분위기보다 훨씬 소란스럽습니다. 유럽은 완전무장을 했고 러시아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았던 그 어떤 독재자보다 더 조직적이고 잔인한 독재를 견디고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사악함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고, 그 나라에서는 이탈리아에서처럼 자유의 형태가 무시됩니다. 유령의 사회가 우리의 눈앞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안전함이 자유를 포기한 값으로 얻어져 마구간의 배부른 짐승의 안전함이 되고, 인류의 모든 높은 열망이 무소불위의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힙니다. 지금이 있는 그대로 만족해도 되는 때입니까? 바로 지금이 인류가 심연의 수렁에서 건짐 받기 위해 다시 회복해야 할, 잃어버린 비밀이 있지는 않은지 자신에게 심각하게 물어야 할 때가 아닙니까?
---「1강 “현재의 위기,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중에서
현대인은 복음서가 보여 주는 예수의 모습에서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을 나누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 모습에서 너무 진부한 초자연적 요소들을 빼버리자. 그러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위대한 종교적 천재로서 실제 예수의 모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구분하려는 노력은 결국 실패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복음적 모습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는 전체의 모습에서 뺄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피상적이고 쉬운 방법으로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가 그리는 예수의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이니까요.
---「6강 “우리는 성경을 변호해야 하는가?”」중에서
역동적인 자연의 과정 앞에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 섭니다. 우리는 우리의 보잘것없음에 놀라고 우리가 이 엄청난 전체의 아주 미미한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현대인이 이해하기 시작한 이 광대함에 범신론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적용합니다. 전체적으로 드러난 우주 자체가 곧 하나님입니다. 의미만 놓고 보자면 그것이 범신론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견해는 인류에서 탁월한 사고에 자극을 주고 위대한 시적 감각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억압당하고 눌린 영혼에게는 그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합니다. 만일 전체를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 하나님이고 설령 우리가 그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 이전보다 더 나아질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을 호소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향방 없는 힘의 노리개에 불과할 뿐입니다.
---「9강 “창조주 하나님”」중에서
개혁을 어떻게 성취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들은 지난 오랜 시간 동안 기독교회에서 행해졌던 모든 것을 부인하거나 무시함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말하지요. “그냥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교단의 모든 쓰레기와 분명하게 결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둘러앉아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서툴고 간략한 문장들로 요약하려고 하면서 교회의 위대한 신조들은 그냥 망각 속으로 사라져 버리게 둡니다. 만일 어느 한순간 갑자기 기독교의 모든 신조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우리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고 상상해 보면, 제가 믿기로는 언젠가 꼭 필요한 교회의 신조들이 결국 다시 세워질 겁니다. 또 다른 1,900년이 걸리겠지요. 만일 기초가 남아 있다면 상부 구조는 다시 지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손해가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위대한 신조의 도움 없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움 없이, 종교개혁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도움 없이 성경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39강 “발전해 온 기독교 교리”」중에서
현대의 성명문의 저자들은, 우리의 차이를 묻어 버리고 몇 가지 필수적인 것만 붙들자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조의 저자들은, 성경을 열고 성경에 포함된 진리의 풍성함을 온전히 드러내자고 말합니다. 현대의 성명문의 저자들은, 교회에 자리 잡은 다양한 사상의 경향을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말합니다. 기독교 신조의 저자들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제거하는 데 열심을 다하여 교회가 하나님의 신비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게 하자고 말합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현대의 성명문을 작성한 저자들이 진리의 존재를 전혀 견고히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교리란 그저 기독교 경험의 표현이기 때문에, 교리는 바뀌어도 기독교의 경험은 남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현대주의가 내일의 정통이 되고, 또 다른 새로운 현대주의에게 지금의 자리를 내주는 일이 이어진다는 겁니다.
---「“신조와 교리적 진보”」중에서
확정된 것의 결여로 인해 우리 현시대의 과장된 발전은 환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현대의 시작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경을 거의 포기했습니다. 아무것도 확정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되고 모든 진리를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야 하니까요. 그 결과가 무엇일까요? 전무후무한 퇴폐 현상?엎드러진 자유, 거의 아무 제재 없이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노예 장사, 수백 년 동안의 성취가 먼지처럼 뒹구는 것, 상냥함과 예절이 무시되는 것, 인생에서 모든 의미가 상실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학을 위한 과학을 추구했지만 결국 세계대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했지만 추함과 광기만 남았습니다. 사람을 위한 사람을 추구했지만 사람이 기계가 되는 로봇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먼곳에 갔던 탕자처럼 다시 우리 자신에게 돌아와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이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감으로 진정한 발전을 추구해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41강 “하나님, 인간, 구원”」중에서
오늘날 종교에 관한 여러 대중적인 책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어떤 책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해 말하고, 심지어 어떤 책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redemptive)이라고도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십자가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속적이지만 우리의 고난도 구속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더 고귀한 삶을 얻기 위해 그 길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다루는 대부분의 현대 서적에 편만하고 핵심적인 엄청난 왜곡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단순히 자기희생을 위한 일반적 원칙의 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속죄의 도덕적 감화론입니다.
---「49강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