遇不遇 개념의 형성
제1장 遇不遇 개념의 淵源과 神話的 形象
인간의 삶은 만나고(遇) 만나지 못함(不遇)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자연계의 모든 생명체는 갖가지 상황들을 만나거나 만나지 못해 생명체의 존속에 영향을 받는다. 움직이는 생명체는 생명의 보존을 위해 끊임없는 이동을 하면서, 어떤 상황을 만나거나 만나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한다. 따라서 동물은 필요에 따라 만나고 만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들은 철 따라 서식지를 옮겨가기도 하고, 위험한 곳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거처를 바꿈으로써 생명을 이어간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는 객관적 상황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내적 변화를 통해 외부의 조건에 적응하며 생명을 이어간다. 따라서 식물은 외부의 조건 변화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식물은 맑은 날의 따스한 태양빛과 흐린 날의 폭풍우를 견뎌야만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인간이란 동물 역시 본능적으로 생명의 보존을 위해 주변의 조건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 했던가? 이 점이 여타 동물과 다르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 욕구 충족에 만족하지 않고 정신적 이상을 추구한다. 따라서 인간만이 정신적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기도 하고, 세속의 명예와 부를 거부하기도 하며, 더러는 과도한 명예와 부 그리고 육체적 욕망을 탐닉하다 패가망신하기도 한다. 동물은 배가 차면 결코 더 먹지 않고, 식물은 더 화려한 꽃과 알찬 열매를 위해 결코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이렇게 추론해가면 만남의 문제가 생명의 존속과 연관되고,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불교의 연기설과 맞닿아 있음을 볼 수 있다. 중국인은 만남의 문제를 현실적인 측면에서 사유했다면, 인도인들은 이에 머물지 않고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천착해 들어가, 遇가 인연에 의해 일어남을 보고 12연기설과 같은 깊고 精緻한 사유를 펼쳤다.
생명체의 靈長인 인간의 만나고 만나지 못함의 문제는 다양한 요소들이 얽혀 있다. 현실적인 문제로서 遇不遇는 개인의 삶과 인생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지식인들의 遇不遇는 더욱 그러하다. 사회의 구조가 비교적 단순했던 고대에는 관직에 나아가 자신이 닦아왔던 학식을 근거로 꿈과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당시 지식인의 유일한 出路였다. 그러나 학식을 이루었다고 반드시 세상에 곧바로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며, 사회조직의 틀에 들어가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순탄하게 실현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식인들의 고뇌가 시작된 지점이다. 遇와 不遇, 出仕와 隱居, 이것은 그들에게 운명인가 선택인가?
고대 중국 지식인들은 자신의 出仕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사유하기 시작하였다. 관리 등용 제도가 시행되기 전, 士人들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먼저 ‘현명함과 재능(賢能)’을 갖추어야 했고,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알아보고 수용할 수 있는 君主가 필요했다. 이때 士人들은 개인적으로 군주를 찾아가 자신의 재능을 드러내거나, 군주가 현능한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방문하여 出仕를 간청하는 방법으로 인재가 등용되었다. 따라서 인재 등용제도가 있기 전, 士人들이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능력을 갖췄다는 전제하에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야 하는 일정 정도의 우연적 요소가 따라주어야 한다. 이것을 가리켜 ‘때를 만났다(遇時)’ 하고, 반대의 경우는 ‘때를 만나지 못했다(不遇時)’고 한다. 현능한 士人이 군주가 尊賢使能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때를 만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했을 경우는 회재불우(懷才不遇)하게 된다.
이 장에서는 먼저 갑골문과 금문에 보이는 ‘遇’자의 자형을 분석함으로써 遇자가 어떻게 ‘우연히 만나다’의 의미를 갖게 되었는가의 어원을 탐구하고, 아울러 선진 문헌에 보이는 遇자의 용례를 통해 그 의미의 변환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서, 중국 고대 신화 인물 중, 遇不遇의 전형적 사례들을 분석함으로써 후대 인물들과 어떻게 類比推理 되는 가를 드러낼 것이다.
1. 遇字의 어원
인간이 원시시기에 느끼고 인식하며 사유한 것에 대해 어떻게 나타내려고 했는지 즉 문자로 표현하려고 하였는지에 대한 과정은 정확하게 복기할 수 없다. 그저 어떤 뛰어난 사람들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 사유의 대상을 문자화하였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여기서 다루려는 ‘만나다’는 개념을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문자로 형상화하였는지의 과정은 밝힐 수 없다. 그러나 현존하는 이와 관련된 자료를 통해 그 어원의 형성과정을 어느 정도는 설명해 볼 수 있다. 遇字의 어원을 알기 위해 먼저 초기의 사전인 《爾雅》와 《說文解字》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爾雅》에는 “?와 逢은 만나다는 遇의 의미고, ?와 逢 그리고 遇는 거스르고 저촉되다는 ?의 의미이며, ?와 逢과 遇와 ?은 보다는 見의 의미다.(??逢, 遇也. ??逢?遇, ?也. ??逢?遇??, 見也.)”라 하고, 郭璞은 注에서 “가다가 서로 만나면 보는 것이다(行而相値卽見)”고 풀이한다. 《설문해자》에는 “遇, 逢也, ??, ?聲”이라 한다. 그리고 遭, ?, 逢字를 모두 遇字로 풀이하고 있다. 즉, “遭, 遇也, ??, 曹聲”, “?, 遇也, ??, ?聲”, “逢, 遇也, ??, ?聲”이라고 互訓한다. 다시 말해 遇는 遭, ?, 逢의 의미와 상통한다. 段玉裁는 ‘逢’자의 《注》에서 聲符의 “?은 ?의 의미다. ?는 거스르거나 맞이하다는 의미이므로, 이 字는 형성이며 회의를 포함한 글자다.(?, ?也. ?, 逆也, 此形聲包會意.)”라고, 遇, 遭, ?, 逢의 글자 중 이 逢자만 聲符에 만나다는 의미부호가 있음을 드러낸다. 갑골문을 조사해 보면, 遇와 遭자는 보이지 않고, ?와 逢자만 보인다. 逢자는 갑골문에 從??聲의 (??)자가 보이는데, 羅振玉과 李孝定은 ‘逢’자로 釐定하고 地名으로 쓰였다고 한다. 즉 갑골문에서는 아직 逢자가 만나다는 의미로 쓰인 실례는 보이지 않는다. ?자는 갑골문에 초기의 형태로 (?)자가 보이고, 이외에도 從止인 , 從?인 , 從?止인 등 자의 다양한 형태의 ?乳字도 보이는데, 학자들은 이들을 모두 ?자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다만 의 형상에 대한 해석에는 이견을 보이는데, 李孝定은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만나는 형상”으로 보고, ?錫圭는 《설문해자》에 보이는 ?의 해석과 郭沫若의 ‘?’자의 初形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목재가) 마주 대하여 교차한 형상”으로 본다. 갑골문 의 형상으로 보아, ?자는 李孝定의 추측처럼 물고기가 서로 만나는 형상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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