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목항의 낮과 밤은 좌절로 가득했다. 그나마 전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의 손길로 고단한 하루하루를 이겨 내고 있었다. 수천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은 식사와 간식을, 의료품을, 생필품을 전달했고 한국전력공사에서는 전기를 지원했다. 기자들은 읍내로 나가 찜질방, 모텔 등에서 기거하며 교대로 취재를 이어 갔다. 하지만 기자들은 이곳에서 최악의 ‘불청객’이었다. 신분을 드러내는 것도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현장에서 친한 기자 선배이자 형을 만나 “어, 오셨네요?”라고 손을 흔들었다. 선배는 손짓으로 ‘쉿’ 포즈를 하며 한쪽 구석으로 급하게 나를 끌었다. “여기서 서로 알은척하면 안 돼. 특히, 웃지 마. 정말 일 난다.”
오보가 연발될수록, 자극적 보도가 나올수록, 현장 기자를 향한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한 언론은 ‘선내 엉켜 있는 시신 다수 확인’이라는 제목을 달아 기사를 냈다. “친구가 사망했다는 걸 아느냐”고 생방송에서 물은 앵커도 있었다. 기자를 향해 생수병이 날아왔다. 양복을 입고 있거나 수첩만 들고 있어도 멱살을 잡혔다. 사고 초반 ‘전원 구조’라는 대형 오보를 본 세월호 가족들은 ‘언론은 구조에 방해만 된다’며 마음을 굳게 닫았다. 기자들은 어떻게든 취재를 진행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옆에서 가족들이 하는 말을 엿듣거나, 어느 한 기자가 가족 인터뷰를 시도해 조금이라도 진행이 되면 한 명, 두 명씩 멘트를 따기 위해 몰려들었다. 기자인 내가 봐도 그 모습이 마치 ‘하이에나’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든 상황을 전파하는 게 기자다. 그러나 그만큼 회의감도 들었다. 그 회의감과 슬픔을 이기지 못해 세월호 참사 이후 기자를 그만둔 이들도 있었다.
기자 2년 차에 맞은 세월호 참사는 ‘기자란 무엇일까’, ‘기자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들을 강하게 심어 줬다. 사건의 트라우마는 상당 기간 지속됐다. 한동안은 잠을 자면 그때의 절규가 생생히 들려왔다.
---「세월호, 휘몰아치는 정국 한복판에서」중에서
『뉴스1』으로 이직했을 때가 2016년 6월이다. 사건팀 배정을 받고 그해 10월 박근혜 정부 ‘국정 농단’ 사태가 터졌다. 이번에도 현장은 사건팀의 몫이었다.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하야하라’며 첫 촛불집회가 열렸다. 주최 측 추산 3만여 명의 인원이 모였다. 크고 작은 집회를 취재해 봤지만 규모와 분노 면에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2차 촛불집회는 주최 측 추산 20만여 명, 3차는 100만여 명을 돌파했다. 경찰 추산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12월 3일 6차에 이른 촛불집회는 주최 측 추산 170만여 명(경찰 추산 약 43만 명)으로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대 규모라는 점이 공식 인정됐다.
코로나19가 없었던 시절, 촛불집회는 정말 폭발적이었다. 시민들을 인터뷰하며 때론 뭉클했고, 때론 분노에 공감했다. 수능이 끝난 수험생들도 광장으로 나왔다. 남녀노소 누구나 예외가 없었다. 분노는 때론 축제로 승화됐다. 아무리 기사를 써도 그 에너지를 담아내긴 역부족이었다. 광화문 광장 바닥에 앉아 기사를 송고하고 때론 경찰 병력에 갇혔다가 겨우 빠져나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혹한기에 손이 얼어붙어 키보드를 제대로 치기 어려울 정도였다. 12월, 헌법재판소 심판 직전에는 탄핵에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도 달아올랐다. 양 진영을 오고 가는 기자 입장에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었다. 특정 언론사 기자라면 폭행하거나 욕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누군가는 붙잡혀 옷이 찢어지고 상처도 났다.
“와아, 탄핵이다.”, “이럴 줄 알았어. 모두 박수.”
2017년 3월 10일 11시 21분.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인용 선고를 내린 날, 서울역 대합실에 자리했다. 텔레비전에 눈과 귀를 집중하던 시민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현장은 축제 분위기에 접어들었다. 전국 곳곳 누군가는 환호하고, 누군가는 묵묵히 바라보고, 누군가는 분노했다. 나는 그저 마음의 큰 짐 하나가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젠 주말 집회 취재도 끝이라는 얄팍한 홀가분함과 함께.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을 거치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