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은 사전성을 갖는다. 이것은 다른 공공사회복지 서비스와 크게 다른 특징이다. 사실 젊고 건강하고 괜찮은 일자리가 있는 성인은 공공사회복지서비스의 혜택을 피부로 느끼기 어렵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나거나 일자리를 잃었을 때에야 사회복지서비스가 등장한다. ‘일이 벌어지면’ 그때 도와준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먼저’ 모두에게 지급된다. 사후적으로 돕는 사회복지서비스는 ‘원상회복’이 목표다. 물론 이런 공공서비스 역시 여전히 중요하다. 그런데 기본소득은 사람들의 삶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완전히 새로운 선택을 할 기회, 누구라도 역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 p.39-40, 「코로나 19를 막는 방법」 중에서
그럼, 모두에게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하지 않는 자들에게 왜 소득을 주는가?” 이 질문을 따져보자. 여기에는 ‘소득이란 일한 대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과연 그럴까? 2018년 국내 30대 대기업 최고경영자가 받은 연봉은 일반 직원 평균연봉의 30배에 달했다.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직원 평균연봉 9800만 원의 154배인 138억 원을 받았다(〈조선비즈〉 2019년 4월 5일자). 최고경영자들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직원들보다 30배나 더 일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여기에는 우리가 짐작하고 있는 불공평이 숨어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 노동자가 받는 소득은 오로지 그가 일한 대가일까?
--- p.49-50, 「신천지 코로나? 그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중에서
우리가 꿈꾸는 참된 공동체는 공적 서비스만으로 이룰 수 없다. 사회복지서비스는 아무리 촘촘하게 짜도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다. 또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는 공적 서비스는 딱딱하고 비효율적으로 흐를 수 있다. 공동체를 완성하는 것은 이웃사촌이나 지역사회다. 21세기에 웬 이웃사촌이냐고? 사실 나 역시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터놓고 왕래하고 서로 돕는 이웃이 있었다면, 제주도 모자는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충분한 기본소득이 있다면 우리는 돈 버는 노동에 대한 압박, ‘먹고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기꺼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기본소득 정신이다. 지금 우리에겐 ‘사회적 거리’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돌보는 사회’가 필요하다.
--- p.70-71, 「사회적 거리 두기?」 중에서
아이가 커서 시간 여유가 생기면 중년 여성들도 일자리를 알아본다. 하지만 ‘돈 몇 푼 안 주는’ 시간제가 대부분이다. 가사노동과 일자리를 병행하기에는 부담과 희생이 너무 크다. 그래서 집에 머물고 만다. 전업주부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으니,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을 도맡아 하지만 엄마들의 발언권은 약하다. 몸과 마음이 병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성 불평등 문제 역시 한두 가지 해법만으로 풀기 어렵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엄마들’은 가정이라는 닫힌 방에서 나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가사노동과 감정노동을 가족, 특히 남성과 나누어야 한다. 기본소득은 엄마들에게 돌파구를 만들어줄 수 있다. 기본소득은 가구주가 아니라 개개인에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 p.92-93, 「중년 여성들이 아픈 이유」 중에서
청소년을 포함해서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는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서는 ‘보편성’ ‘무조건성’ ‘개별성’만큼이나 ‘충분성’이 중요하다. 한 사람당 매월 60만 원의 기본소득도 세 식구면 180만 원, 네 식구면 240만 원이 된다. 이 정도면 우리 삶에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한 청소년이 자신의 삶에 관해 다른 선택을 할 만큼 충분하지는 않다. 그러면 150만 원의 기본소득이라면 어떨까? 기본소득 액수가 많아질수록 소득 재분배 효과도 커진다. 학력에 따른 소득 격차가 줄어들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꼭 대학에 들어가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사실 학생과 학부모 대부분에게 SKY 대학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니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불안정한 미래’를 피하려고 공부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 p.123, 「다른 꿈을 꿀 권리」 중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주요 반론 중 하나는 뜻밖에도 노동조합에서 나오고 있다. 기본소득이 노동조합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우려한다. 기본소득을 받으면 자본가들이 임금을 삭감해도 노동자들이 투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노동자는 줄어든 임금을 이미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나라와 OECD 국가들의 노동소득분배율을 살펴보자. 노동소득분배율이란 국민소득 중 노동자의 몫을 가리킨다. 1996년부터 2015년까지 OECD 회원국들의 평균 노동소득분배율은 1.75퍼센트포인트 떨어졌다. 그런데 우리나라 노동소득분배율은 1996년 66.12퍼센트에서 2016년 55.72퍼센트로 10.4퍼센트포인트나 하락했다. 분석대상인 OECD 20개 회원국 가운데 가장 크게 떨어진 것이다. 2015년 기준으로 우리나라보다 노동소득분배율이 낮은 나라는 일본과 그리스뿐이었다.
--- p.157, 「그들이 철탑에 올라가는 이유는?」 중에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문제투성이지만 그래도 예전보다 좋아진 점도 분명히 있다. 나는 빛나지 않는 곳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묵묵히 일한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덕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열정페이’에 만족하라고 더는 요구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들이 철탑에 올라가지 않기를 바라듯 말이다. 아니, 시민사회운동은 지금보다 훨씬 평범한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한다. 시민사회운동이야말로 인공지능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라는 직업도 괜찮은 일자리가 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을 받으면 사람들은 다양한 시민사회단체에 가입하고 활동에 참여할 여유가 생긴다. 회비도 더 낼 수 있다. 단체 활동가들이 더 많이 생길 테고, 시민사회운동은 지금보다 활발해질 것이다. 그러면 내 친구도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를 마음껏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 p.176,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중에서
시민배당, 토지배당, 탄소배당을 모으면 370조 원에 이르고, 모두에게 매달 60만 원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 여기에 ‘데이터배당’을 추가해보자.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겼을 때 세계는 깜짝 놀랐다. 그 인공지능이 수많은 바둑기사의 기보를 데이터 삼아 학습했다는 사실도 덩달아 알려졌다. 이렇게 인공지능은 인류가 쌓아온 지적·문화적 유산을 밑거름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 수십억 명이 검색하고 클릭한 덕분에 구글이나 아마존은 인간의 행동을 예측해서 광고를 하거나 상품을 팔고 있다. 과거와 현재 인류가 활동한 결과인 ‘데이터’는 명백히 공통부다. 이들 기업에 ‘데이터세’를 부과하고 모두에게 데이터배당으로 나눠주어야 한다. 디지털산업이 발전할수록 데이터배당 역시 커진다. 데이터배당은 ‘충분한’ 기본소득을 위해 점점 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p.212-213, 「기본소득은 가능하다」 중에서
엄마는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집안일을 끔찍하게 여겼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부엌으로 가면서 엄마는 자주 말했다.
“한 알만 먹으면 배부른 알약이 개발되면 좋겠다.”
나도 엄마가 해주는 밥이 지겨웠으니 엄마는 오죽했을까. 엄마는 조금 더 일찍 집 밖으로 나섰어야 했다.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당연히 다른 사람들의 끈질긴 도움이 필요했을 것이다. 엄마에게는 다른 숨겨진 재능이 있었을지 모른다. 고스톱과 노래방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엄마의 흥과 열정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꽃을 피웠을 수도 있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그래서 사랑을 받는 로베르토가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돈을 못 버는 일이어도 상관없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말이다. 앞서 나는 “기본소득은 가능하다”고 밝혔다. 물론 엄청나게 큰돈이 드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에게 기본소득은 반드시 가능해야 한다. 엄마에게 숨겨진 가치가, 못다 피운 꿈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나라와 세계에는 수많은 ‘엄마들’이 있기 때문이다.
--- p.218-219, 「세상의 엄마들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