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낮은 안개가 낀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 첫 문장 「헤븐 Heaven」
대한민국보다 평균 3배나 높은 임금을 받으며 일체의 세금이 없고, 북유럽 수준의 복지혜택에 비싼
명품들을 면세로 구입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헤븐에서 쫓겨나고 싶어 하는 거주민들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비자를 받고 들어온 관광객들 역시 범죄 행위를
저지르면 즉각 추방당하고, 다시는 헤븐에 들어올 수 없다는 사전 교육을 충실히 지키는 편이다.
그래도 사건이 벌어지면 헤븐의 행정국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사고로 포장한다. 왜냐하면 이곳은
사건이 벌어지면 안 되는 천국이니까,
--- p.8, 「헤븐 Heaven」중에서
“망할, 왜 이렇게 헤븐을 못살게 구는데? 헤븐이 아니었으면 제2차 금융위기 때 모라토리엄
선언하고 쫄딱 망할 뻔했던거 기억 안 나?”
“어차피 헤븐이 천사라서 대한민국을 도와준 건 아니잖아요.”
“세리(SERI : 삼성경제연구소의 영문 약칭)에서 매년 발표 하는 헤븐 관련 보고서는 읽어봤어?”
“알아요. 센트럴 거주민의 60퍼센트가 한국인이고, 외국 관광객이 헤븐을 방문하면서 대한민국에
뿌리고 간 돈이랑 각종투자로 얻은 간접효과를 합하면......”
“221억 달러지. 그리고 헤븐의 무관세 정책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건 대한민국이야. 그런데
인터넷으로 떠도는 음모론을 사실인 것처럼 방송하고 그걸 철썩 같이 믿는 이유는 뭔데?”
“너무 잘난 이웃을 둔 두려움이죠.”
연지의 대답에 기준이 피식 웃었다.
--- p.35, 「헤븐 Heaven」중에서
화성은 광부의 예상보다 훨씬 기이한 곳이었다.
--- 첫 문장 「화성의 폐허」
금이 얼마나 귀한 금속인지 생각하라지. 사람보다 귀하잖아. 금 때문에 사람을 화성으로
보냈다니까. 회사는 인간이 아니야. 얼굴이나 마음이나 양심이 없어. 거대한 기계와 다를 바 없지.
기계가 나를 집어서는 우주선에 넣고 화성으로 날려 보낸 거라고. 금을 캐오라면서 말이야. 나는
반항할 수도 없었지. 다 금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 p.78, 「화성의 폐허」중에서
컬쳐호에서 얻어낸 데이터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광부가 도착한 곳은 계곡이었다. 그들은 계곡 주변을
돌아보다가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는 오래된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과학자가 말했다.
― 분명 화성인이 남긴 문명입니다. 자연적으로는 생길 수 없는 구조물입니다. 광부가 말한 금이
있었다는 그 유적지 같습니다.
― 화성인은 어디 있을까?
― 멸망하고 문명만 남았을 겁니다. 광부는 여기까지 왔고 이곳에서 실종된 것이 분명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안전할까요?
― 조난돼도 아무도 구하러 오지 못한다는 건 알고 있었잖아.
비행사는 말했고, 그가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무척 어두웠으므로 과학자와 비행사 둘 다
헬멧의 조명을 켜서 불을 밝혔다. 기이하게 각진 벽은 꼭 벌집 같았고, 촘촘한 계단이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왼쪽으로 구부러진 나선형 계단을 계속 걸어 내려갔다. 과학자가 갑자기 마스크를
벗더니 산소와 기압이 인간에게도 적당해서 벗고 있어도 된다고 말했다. 비행사는 되물었다.
― 하지만 왜 지구인에게 맞는 환경이지? 이곳은 화성인의건물이잖아.
― 내려가서 확인하죠.
그들은 어둠을 헤치고 아래로 끝없이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처음에는 동굴 안의 더 큰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갈수록 계단과 복잡한 벽 자체가 건축물임이 확실해졌다.
어디에도 화성인의 흔적은 없었다.
--- p.94, 「화성의 폐허」중에서
풍향이 바뀌었다. 소나무 가지에 묶어둔 손수건이 나부꼈다.
--- 첫 문장 「불면의 밤은 끝나고」
“매립지에 세워진 도시였다고 들었어요. 나도 자세히 아는건 아니지만.”
하지가 무심한 표정으로 철조망 너머 뜯기고 갈라진 건물을 바라보았다.
“결국은 어느 지구에도 속하지 못하고 버려졌겠죠. 인구는 손쓸 수 없을 만큼 줄고 있는데다,
해안가에 지어진 도시들을 보존하기에는 비용이 감당 못할 수준이었으니까. 방파제를 높이는 데도
한계가 있었을 테고.”
해인의 보폭이 넓으면서 가지런했다. 그때 하지가 고집스럽게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곳에서, 혼자 살았던 거예요?”
“네.”
“얼마동안이요?”
“꽤 오래동안요.”
다소 불분명한 그 대답이 신경에 거슬렸는지, 싫으면 관두라 는 식으로 하지가 성마르게 손을
저었다.
해인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어디 아픈 데는 없고요?”
하지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네, 괜찮아요.”
--- p.145, 「불면의 밤은 끝나고」중에서
가이아는 그들이 거둔 명백한 승리의 증거였다. 가이아, 그곳은 기획자가 초안을 내어놓고 서른세
명의 기술자들이 세부규약을 발전시켜 만든 공동체였다. 해인은 가이아의 탄생에 이바지한
기술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모두 여자였고, 기획자라고 불리던 중년의 지도자 역시
그러했다. 구릉과 구릉 사이 큰 강을 낀 그 대지는 원래 기획자의 소유였다. 그는 사유지였던 그
공간을 자신과 동료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터전으로 제공했다. 가이아의 여자들은 노동자였다.
선생이고 학생, 자매며 연인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여행자일 수 없었다. 단단하게 뿌리 내린
기둥이자 빈틈없이 쌓아 올린 벽, 서로를 이 땅에 매어놓는 말뚝이었다. 머무르며 책임지는 행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가이아에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 p.156, 「불면의 밤은 끝나고」중에서
아내가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서 시큼한 냄새가 훅 풍겼다.
--- 첫 문장 「미래 뉴스」
아내의 채근에 여자애에게 다가가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재갈을 물린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품이 넉넉하지 않은 블라우스 옷깃 사이로 불어터진 가슴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았다. 이 봐, 정신 차려. 이번에는 좀 더 세게 흔들어봤지만, 여자애는 여전히 약 기운에 취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여자애의 손목을 묶은 압박붕대가 잘 버티고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아직은, 살아있어.”
“이제 어떡할 거야?”
만삭인 아내는 배 위에 손을 얹은 채 숨죽인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긴, 죽여야지.”
“그래도... 저렇게 어린 애를...”
“수민아, 우리 딱 하나만 생각하자. 우리 아들만.”
나도 이런 상황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곧 태어날 우리 아들만 생각해야 한다.
12년 후에 죽을 운명인 우리 아들을 살리려면 바로 오늘, 저 여자애를 죽여야만 한다.
--- p.191, 「미래 뉴스」중에서
. “내일 뉴스를 알려주는 게 아니었어. 미래 뉴스를 알려주는 거야.”
“그것 봐. 소름 끼쳐. 빨리 버리고 오라니까. 다시 그 벤치에 갖다 두라고. 맞다. 어제 그 벤치, 저
라디오가 있던 벤치에만 물기가 없었잖아? 그거부터 이상하지 않아? 귀신들린 라디오 인지도 몰라.
얼른 버려.”
“안 돼.”
“안 된다고? 지금 나한테 안 된다고 한 거야?”
“수민아, 생각해 봐.”
“뭘?”
“H 타워 화재는 끔찍한 일이지만, 이 라디오 때문에 발생한 건 아니잖아. 오늘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야. 그렇지?”
“당신,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데?”
“이게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이건 완전 행운이야. 당장 지금 뉴스만 해도 그래. 내일 전기차 관련
종목을 사두면 사흘 후에 상한가를 친다는 거잖아.”
어어, 감탄사를 내뱉는 아내의 눈이 점점 커졌다. 나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 p.207, 「미래 뉴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