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따금 뭐랄까, 아내의 본성을 일깨워주고 싶다는 강렬하고도 무용한 욕망에 사로잡히곤 했어요. 나는 그 여자의 본성을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잘 이해하기만 한다면 내심 편안하게 순응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저 남자는 이 수수께끼의 갈피를 영원히 잡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니 참으로 부당한 일이었어요. 내게는 이토록 명백한 사실을 저토록 이해하지 못하고 영혼이 너덜너덜해지도록 고민하고 있다니요. --- p.77 「유령 연인」 중에서
게다가 생각해보면 또 말이 안 될 건 뭡니까? 250년 전에 연인을 살해한 여인이 다시 태어난, 누가 봐도 이승의 것이 아닌 기이한 존재라면, 그런 생명체라면(이승의 연인들과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할 테니) 전생에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남자를 제 곁으로 불러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 p.82~83 「유령 연인」 중에서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면, 쉰 살의 노병과 열여섯 소녀의 결합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진짜 의미를 생각해보라. 그건 바로 제왕의 기품을 지닌 이 여인이 금세 하찮은 소지품처럼 취급되었다는 뜻이다. 공작에게 조언이 아니라 대를 이을 씨를 선사하는 것이 자신의 소임임을 거칠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째서 이러저러합니까?’라고 따져 물어서는 안 되고, 공작의 자문관들, 사령관들, 심지어 애첩들에게도 무릎을 굽혀 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리라. 아주 조금만 반항하는 기미를 보여도 공작은 험한 욕설과 구타를 서슴지 않는다. 교살하거나 굶겨 죽이거나 아무도 모르는 지하 감옥에 던져버리겠다고 윽박지른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이런저런 남자에게 너무 길게 눈길을 주는 아내에 대한 생각을 품게 되었다면 그녀는 어떨까. --- p.130~131 「끈질긴 사랑」 중에서
그녀의 운명은, 시간 차는 있더라도 결국 적에게 승리를 거두고, 어떤 상황에서도 적의 승리를 패배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 p.132 「끈질긴 사랑」 중에서
그녀를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자만하는 남자라면 명줄이 길어서는 안 된다. 일종의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런 행복에 죽음으로 값을 치르겠다는 각오만이 그녀의 애인이 될 자격을 부여할 터이기 때문이다. 기꺼이 사랑하고 고통받고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 p.133 「끈질긴 사랑」 중에서
우리는 소위 과거의 미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비웃는다. 우리가 자랑하는 과학도 미래의 인간이 보기에는 미신에 불과할지 모르는데. 왜 꼭 현재가 옳고 과거가 틀려야 하는가? --- p.163 「끈질긴 사랑」 중에서
조금씩 조금씩 나는 소리를 분간하기 시작했다. 작고 날카롭고 금속성인 분절된 음들이 만돌린 소리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 소리에 합쳐진 목소리가 있었다. 아주 낮고 달콤한, 차라리 속삭임에 가까운 그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더니 낯설고 이국적이고 고유한 자질의 정교한 비브라토가 그 장소 전체를 가득 메웠다. 그 음은 끊이지 않고 벅차게 부풀고 또 부풀어 올랐다. 느닷없이 소름 끼치게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더니 몸뚱어리가 바닥에 쿵 쓰러져 부딪는 소리가 들리고, 온갖 탄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 p.195 「사악한 목소리」 중에서
삶이야말로 미지의 출발점에서 시작해 미지의 목표 지점으로 가는 여정이다. 궤적을 따라 움직이는 우리는 끝없이 복잡하게 가로지르고 또 교차하는 길들을 다 파악할 수 없고, 우리가 스스로 제작하는 지도는 공상에 빠진 아이들이 끼적거린 낙서에 불과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야 할지조차 모르는 이런 여행길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눈을 맑게 뜨고 발을 더럽히지 않고 쓸모없는 짐을 최대한 많이 버리고 길가에서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과 허브를 따서 두 손 그득 채우는 것뿐이다.
--- p.234~235 「마법의 숲」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