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카는 의자에서 일어나 우시가와라가 던진 봉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선 채로 원고를 꺼내 몇 매를 휘리릭 훑었다. 그리고 감동했다는 듯이 말했다.
“이거 정말 굉장한데요!”
“그렇지.”
“그야말로 천재적이군요.” 아라키가 웃으면서 원고를 봉투에 집어넣으려는데, 몇 장이 그만 속에서 빠져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이, 조심해야지, 그 원고, 2백만 엔짜리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아라키는 조심조심 원고지를 집어 책상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이 쓰레기 같은 원고로 2백만 엔이나 받으니 꽤 쏠쏠한 장사입니다. p.22
“그래서 당사는 그런 작품에 대해 조인트 프레스라는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조인트 프레스?”
“이는 출판사와 필자가 함께 책을 출판한다는 취지하에 고안된 마루에사 특유의 출판 형태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려서 , 출판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마루에사와 필자가 공동으로 부담하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훌륭한 작품인데 각가지 사정으로 출판이 어려운 원고도 세상에 선보일 수 있습니다. p.30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책 천부쯤 몇 십만 엔이면 만들 수 있다는 걸 왜 모를까요."
“그런 게 알려지면 큰일이지.” p.34
“늘 그렇지만 부장님의 수완에는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아라키가 풋콩을 까먹으면서 말했다. 둘은 평소에 잘 가는 선술집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소설을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프리터에게 책을 내게 만드니 놀랍죠.”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에 차 있는 젊은이를 그렇게 만드는 거야 손쉽지.” p.98
“게다간 한동안은 베스트셀러가 될지도 모른다는 꿈도 펼칠 수 있잖아. 평생을 두고 쉬이 맛볼 수 없는 행복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고.”
“그런 말을 듣고 보니, 1백 47만 엔이 싸게 느껴지는데요.”
“그럼 싸고말고.” p.102
“그래, 〈준, 천국에서 기다려〉 였지. 지난주에 출간되었지, 아마. 그 책이 왜? 무슨 문제가 있었나. 저자가 뭐라고 했어?” 이이지마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 반대예요. 조금 전에 그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는데, 멋지게 만들어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인사를 하시는 거예요.”
“잘 된 일이잖아.”
“어머니, 통화 중에 우시더라고요, 전, 어머니가 우시는 소리를 들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서, 그렇게 착한 어머니를 속여서 책을 내게 했다는 생각에.” 이이지마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건가.” 이이지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자네는 엉뚱한 착각을 하고 있군!” 우시가와라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p.148
“자기 책을 낸다는 게 그렇게 기쁜 일인가요?”
“어떤 끗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책을 낸다는 게 엄청나게 매력적인 일이야. 자존심과 우월감을 충족시키는데 이만한 일은 없지. 특히 우리나라는 책이 지닌 가치가 높아. 독서가 취미라고만 해도 경의를 표하는 나라니까 말이지. 그렇게 책까지 낸 저자라고 하면 더욱이 존경받는 존재가 되지.”
“그럼 책을 내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뿐인가요?”
“아니지, 우리나라 사람이 특히 좋아하지만, 실은 어느 나라나 비슷해. 미국은 그런 식으로 책을 내는 것을 ‘베니티 프레스’라고 한다더군.”
“허영출판이라, 말이 딱 떨어지네요.” p.168
“얘기가 빗나갔군. 영상과 게임을 이길 수 있는 소설이 현대에는 별로 없어. 이건 어느 분야에나 적용되는 말인데, 재능은 돈이 있는 세계에 모이는 법이야. 현대에 창조적인 재능은 만화나 텔레비전, 음악과 영상, 게임에 모이지. 소설 세계에는 가장 재능이 없는 놈들이 모여 들어. 돈을 벌 수 없는 세계에 재능 있는 놈들이 모여들 리가 없지 않을까.” p.179
“팔리는 작가란, 재능이 있는 작가야. 아이디어가 넘쳐나니까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거라고. 그러니 마감 전에 완성시키는 거지. 재능이 없는 놈들은 아무리 끙끙거려도 글이 안 나오니 매달 마감 날이 다 되어서야 고생하고, 그러다 때로는 원고를 보내지도 못하고.” p.193
“팔리지 않는 작가일수록 팔리는 작가를 바보 취급하지. 팔기 위해서 그렇게 허접한 글을 썼다느니, 그건 소설을 쓰느니, 차라리 안 쓰는 게 낫다느니 말이야. 평소에는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술이 들어가면 그런 속내를 토해내는 바보가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 바보들이 책을 출판할 수 있는 것도 일부 인기 자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 놈들은 모른다니까. 베스트셀러가 있어야 출판사는 팔리지 않는 책도 낼 수 있는 거라고. 팔리지 않는 작가가 팔리는 작가를 바보 취급하는 거나 다름없어. 사실은 날마다 감사해야 하는데 말이야. 만화 잡지가 팔려서 자기 책도 낼 수 있는 건데, 만화를 우습게 여기는 작가도 있지.” p.197
“같은 출판사 입장에서 노로시사의 행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동업자이기 때문에 굳이 엄격하게 말씀드리죠. 노로시사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출판사라고도 할 수 없는 비열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출판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용서할 수가 없군요. 세간에서는 자비 출판 사업이라고 일괄해서 얘기하고 있으나, 노로시사와 마루에사는 사업 이념도 사업 방식도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는 책을 문화로 인식하느냐, 장사로 인식하느냐에 따른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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