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하던 때가 인천으로 온 지 팔년 정도. 아버지에게 이 도시는 여전히 낯선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도시에 집을 마련했다면 어떤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겠지. 여기에 정착하겠다는, 다시 내려가지 않겠다는 의지 말이다. 당신 인생을 회상하는 아버지에게는 비장함과 결기, 노동의 신성함을 완전히 받아들인 자의 완고함 같은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이 아버지가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나이대의 아버지들이란 그런 그리움이랄까 외로움이랄까 하는 감상들을 되레 그 반대편의 것들로 누르기 때문이라고. 물론 이렇게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 p.10~11, 「아이들」
채주는 여미 별명 앞에 ‘오지랖 넓은’이라는 말을 붙이며 마뜩지 않아했지만, 나는 여행 내내 여미가 좋았다. 모일 때마다 월드컵 이야기로 흥분하는 학생들이나 겨울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냉소하는 교수들과 달랐으니까. 여미는 과외를 셋이나 뛰고 논술 채점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테니, 우선 돈부터 모으고 봐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든 다른 길이 열리면 미련 없이 달아날 거라는 여미의 말을 그때 내가 믿었는지 믿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 p.41, 「너의 도큐먼트」
물어보니 마의 닉네임은 ‘슬픔이여 안녕’이었다. ‘문상맨’보다 서정적인 이름이기는 했다. 온라인에서는 슬픔이 사라지느냐고 묻자, 마는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소유해야 할 것도, 고쳐주어야 할 것도, 철마다 갈아주어야 하는 것도, 심지어 소리도, 냄새도, 빛도, 어둠도, 내 몸도, 죽음도 없다. 마는 그래도 우리의 흔적들은 그곳에 남을 거라고 했다. 그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들이고 그렇기에 무한한 인터넷을 떠돌며 영원히 남을 수 있다.
--- p.82,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이 도시는 참 묘해서 어느날은 영원히 서울 시민으로 살 수 있을 듯하다가도 월급이 밀리거나 생활비가 떨어져가면 완강히 내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파도의 반대 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처럼, 물살을 세차게 가르면 가를수록 무언가가 나를 저만치 내보냈다. 혹은 인파를 헤치며 무언가에 쫓겨 달아나는 느낌이기도 했다. 그렇게 개미굴처럼 이어진 서울의 골목을 내달리다보면 용케 내 이름으로 된 주소를 갖기도 하고, 나만큼이나 우왕좌왕하는 남자들과 연애도 하는 거였다.
--- p.245, 「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