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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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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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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268쪽 | 290g | 128*190*18mm
ISBN13 9791160403725
ISBN10 1160403724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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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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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질주하고 있었다. 비록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정신적 핵은 유지하고 있더라도 그 속도가 엄청나 스스로 다른 사람처럼 느낄 정도였다. 생각이, 감정이, 에너지가 쉼 없이 넘쳐흘렀다. 그 이전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었건만 그 시기엔 잠이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잠잘 시간이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멈추지 않았다. 생각은 마치 공중에 별을 흩뿌려놓은 것처럼 번쩍 나타났다가 또 다른 생각을 낳고 떠나갔다. 생각이 명멸을 반복하며 잠들지 못하게 했다. 어떤 생각은 채도 높은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와 뿌리칠 수 없었다.
--- p.24

조증의 봉우리가 높으면 울증의 골도 깊다. 격렬한 조증은 그만큼 깊고 짙은 우울을 드리운다. 조증과 울증은 서로를 질투하며 복수극을 펼친다. 조증을 내버려두면 뒤이어 찾아온 울증이 더욱 집요하게 공격한다. 조증을 그리워할수록 울증은 떠나지 않는다. 당시 내 몸은 조울의 전투장이었다.
--- p.36

조증에서 벗어나 자 날마다 축제 같았던 흥분이 사라졌다. 아무 일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담배 피우는 것도 귀찮았다. 의사는 “조증일 때는 주변 사람들이 힘들고, 울증일 때는 본인이 힘들다”고 했는데 정확한 표현이었다. 소리치고 울고 저항하던 조증 시기, 가족들은 쩔쩔맸다. 그러나 이젠 내가 무기력감에 쩔쩔맸다.
--- p.68

과거를 반추하는 일은 조울병을 치료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것은 병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 조울병의 한복판을 지날 때 보였던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 ‘나’를 재구성해봄으로써 위기에 처했을 때, 감정이 극도로 고양됐을 때 또는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그 패턴을 발견한다면 그다음 찾아올 조울병의 폭압에 방어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
--- pp.78-79

내가 열심히 공부한 것은 본래 가지고 있던 열등감, 콤플렉스, 승부욕, 끈기, 집중력 등 자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았다. 강한 욕망에 따라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내면의 억압’ 도 그에 비례해 쌓여갔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소설’을 읽고 나면 그 시간에 공부하지 않은 데 대한 죄책감을 느꼈다. 일기엔 “오늘도 나는 공부도 하지 않고 ○○를 읽으며 지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 p.107

눈은 그쳤다가도 다시 퍼붓는다. 꽃이 폈는가 하면 잎이 떨어진다. 조울병은 완치되는 병이 아니었다. 2006년 봄 다시 조증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조울병은 계절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움츠러들었던 겨울을 통과하고 새봄이 오는 기쁨에 몸과 마음의 에너지가 가득 차오르는 탓일까. 조증은 봄에 발병하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조증일 때는 모두 봄이었다. 그래서 2001년 조울병을 앓은 이후엔 아름다운 봄은 두려운 계절이었다.
--- p.144

환자들이 정신과 병원을 찾아 실망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대체로 성의 있는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 중 정신과 치료를 시도한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의사의 태도를 못 미더워했다. 의사들이 귀 기울여 자기 얘기를 들어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거다. 일단 병명이 밝혀지고 투약 치료에 들어가면 의사와의 대면 상담은 더욱 소홀해진다. 몇 분 동안 근황과 상태를 묻는 얘기를 나누고 약을 처방받아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물음은 이렇다. “잠을 잘 주무시나요? 약을 잘 챙겨드십니까? 특별히 불편하신 건 없으셨어요?”
--- p.160

정신과 의사들이 뇌에 대한 전문 지식을 이용해 뇌를 올바르게 사용하는 매뉴얼을 가르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우울증을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바라보기보다는 ‘마음의 감기’라며 대중이 편안한 마음으로 병원에 올 수 있도록 설득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낮춤으로써 약간의 의학적 도움만 받는다면 행복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음을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심리 전문가’로서의 떠들썩한 명성보다는 역시 진심이 통하는 의사가 환자에겐 더 좋다.
--- pp.163-164

선생님은 감정은 ‘바다의 파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파도가 없는 바다를 생각해보라고. 파도가 쳐야 바다다운 경관이 생겨나고 그래서 아름다운 거라고 말했다. 또 인생을 항해일지에 빗대 말했다. 감정은 배를 움직이는 엔진이다. 이성은 갈 곳을 알려주는 방향타다. 좌표를 찾을 수 있는 것은 경험의 축적 덕분이다. 우리는 감정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이성을 발휘해 길을 찾는다. 그리고 항해의 다양한 경험을 쌓아가며 서툴렀던 선원은 베테랑으로 성장한다.
--- pp.169-170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행위는 극한 상황에서도 숨통을 틔울 수 있는 한 조각 작은 마당이자, 자기 위로의 습관이자, 위축과 고립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향하는 길이 된다. 조울병은 불가역적인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관계를 다독여야 하는 상대다. 글을 쓰면서 나는 이 까다로운 파트너의 정체를 곱씹고 내게 끼친 파괴적 영향력을 정리할 수 있었다. 가족들이 나로 인해 흘린 눈물을 기록하며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았으며 좌절의 늪에 빨려들어 질식사할 정도로 내가 허약하진 않다는 걸 믿게 됐다. 글쓰기가 고통을 없애주진 않지만 고통을 관통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길러준다.
--- pp.186-187

모든 병이 다 마찬가지이지만 정신질환은 특히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친밀한 관계가 절실하다. 가족에게 버림받는다면 고통과 상실감 때문에 병이 더 악화될 수 있다. 약물치료를 통해 정상 상태로 돌아온다고 해도, 환자에겐 사회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 사회적 관계가 무너져 있다면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완전히 복구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직장생활, 인간관계, 경제적 질서 등을 다시 세우는 데는 공감과 격려, 객관적인 충고, 경제적 지원을 해줄 가족 같은 가까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pp.206-207

생각이 끊임없이 방울방울 이어질 때 가만히 누워 있기는 괴로운 일이다. 특히 부정적 생각이 휘몰아칠 때 누워 있으면 스스로 몸을 묶고 소리 없이 아우성치는 일과 같다. 걷기는 이 ‘셀프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주변 풍광을 보면서 걷다 보면, 깊은 우물 속에 빠져 있던 괴로움이 스르르 몸을 푼다. 절대적으로 느껴졌던 고통의 부피가 줄어든다. 지금 당장 답이 풀리지 않는다고 해도 견딜 힘을 준다. 땅바닥에 몸 전체를 붙이고 꿈틀꿈틀 움직이는 환형동물처럼 길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어가다 보면 영혼의 어딘가가 ‘징’ 울리는 느낌이 든다.
--- p.242

조울병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줬다. 현실과 광기 사이의 좁은 틈에 끼어 심연을 바라보았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었지만, 넘쳐나는 감수성과 창의성, 자발성을 경험했다. 이처럼 고양된 자아에 깃발을 높이 매달고 흔드는, 심장 터지는 경험을 하기 쉽지 않다. 물론 그다음엔 우울의 바닥에서 죽음의 커튼을 들출 뻔했지만 말이다. 조울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응원에 이처럼 마음 깊이 감사하지 못했을 것이고,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몰랐을 것이다.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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