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미숙아를 밤새 지켜보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의무였다. 직원은 모자랐고 인턴들은 신생아의 소생을 위해 며칠 밤을 '헌신해야'만 했다. 나는 그럭저럭 살아남은 일곱 달 반 된, 새끼 새우 같은 아기의 방에서 밤새도록 머물러 있어야 했다. 모태에서 너무 일찍 떨어져 나온 아이는 끓는 물에 데친 인간 형상의 작은 바닷가재 같았다. 아기는 플라스틱 상자 속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코에 연결된 하나의 관은 폐의 분비물을 뿜어내었고, 또 다른 관은 뱃살에 구멍을 뚫어 영양 액체를 위로 직접 조달해 주었다. 관류 주입은 다리 하나에 고정되었고, 다른 관은 맨살의 두개골 꼭대기에 고정시켰다. 아기의 체중은 1.5킬로그램 내지 2킬로그램이었다. 플라스틱 관에 덮인 아기의 숨소리는 기계들 돌아가는 소리와 옆방에 입원한 유아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들릴락 말락 했다.
아기 이름은 실뱅이었다. 나는 '예쁜 이름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그 작은 인간은 날 힘들게 했다. 사지는 상자의 네 구석에 밴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가끔씩 아기는 고사리보다도 작은 손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머리를 손 쪽으로 기울였고, 혀는 그 둘을 가르는 공간을 할짝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초인간적인 힘을 들여 몇 초 동안 손가락을 빠는 데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두 눈은 크게 뜨고 있었다. 방의 불빛은 희미했고 벽은 어두운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이 머리 바로 위의 벽에는 간접 조명이 밝혀져 있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밴드에서 풀어 주었다. 그건 금지된 일이었다. 혈관 주입 튜브를 떼어 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다. 하지만 아이는 절대 그걸 건드리지 않았다. 단지 주먹을 빨아 대고 싶어했을 뿐이다. 난 아이가 울고, 빨아 대고, 숨 쉬고, 빨아 대고, 할짝 대고, 한숨을 쉬고, 자고, 빨아 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는 9월 9일 생이었고 그때 날짜는 10월 13일이었다. 나는 병실이라기보다 청소 도구함을 닮은 방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졸음이 왔다. 코를 꼬집으며 잠을 깨보기도 했지만 간혹 아이가 자면서 울음을 터뜨리면 놀라 벌떡 일어나 아이가 아픈지, 꿈을 꾼 건지, 혹은 의사들이 말하듯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신경 미성숙' 때문에 우는 건지 궁금해했다.
규칙적으로 설탕 수용액이 든 주사기를 전기 영양이 주입되는 관과 연결된 전기 펌프에 넣어 주어야 했다. 매시간마다 서혜부의 움푹한 곳을 만져 맥박을 재서 호흡 운동을 세어 보아야 했다. 4시간마다는 혈압과 체온을 재야 했다. 명령받은 일들을 하기 위한 게 아니라면, 이 미숙아, 이 아이, 이 인간을 되도록 조금만 만지라는 부탁을 받았다. 하지만 난 장갑을 꼈고 상자의 구멍을 통해 손을 집어넣어 고무 장갑 낀 손끝으로 아기를 쓰다듬었다. 나는 플랙스글래스에 입을 대고 아이에게 말을 했고 이야기도 해주고 노래도 흥얼거려 주었다. 30분마다 허파에서 분비물을 뽑아 내야 했다. 흡입 기계를 작동시키고 깨끗한 요도관을 끼워 그것을 코에 밀어 넣어 뽑아 내야 한다.
그걸 할 때마다 아이는 새파래져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지 인정사정 없이 계속하라고 했다. 4시간마다 엉덩이에 항생 근육 주사를 놓아 주어야 했다. 맨 처음 주사를 놓을 때는 아이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더니 호흡을 멈추고는 한참 동안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나는 아이를 죽였는 줄 알았다. 난 몸이 굳은 채 아이를 바라보기만 했고,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요청하러 갈 엄두도 못 내고, 바보처럼 일을 처리해 아이를 죽음에 이끌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물론 나는 주사 바늘을 어디에 어떻게 꽂아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고 지시받은 대로 행했다. '하지만 그게 그토록 아이를 아프게 할 거라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나는 아이에게 더 이상 주사를 놓지 않았고 주사약 병은 세면대에 쏟아 버렸다. 30분마다의 흡입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바라보고 인큐베이터에 귀를 대고 듣다가 아이의 호흡이 갸르릉 거리기 시작하면 흡입을 시켰다. 아이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치워야 할 때가 된 그 순간에 말이다.
새벽에 나는 장갑을 벗고 10분 동안 비누질을 해서 손을 닦고는 맨손을 아이 손 밑에 집어넣어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손가락은 내 새끼손가락을 움켜쥐었고, 주먹으로 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서는 쭉쭉 빨았다. 나는 상자에 기대서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침에 그곳을 나왔을 때, 우리 둘을 그 안에 집어넣은 채 그게 무얼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을 증오했다. 잠시라도 문틈에 머리를 들이밀어 볼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던 간호사들을 증오했다. 사형 집행인이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맡긴 채 부르주아적인 근성을 즐기며 저녁을 먹고 시가를 피우러 떠나 버린 의사들을 증오했다.
아침 식사 시간에, 그건 형성이 잘못되어 고통받는 수많은 다른 아이들처럼 그저 미성숙아일 뿐이라고 나한테 설명하던 그 인턴을 증오했다. 거기에 감정을 섞을 필요가 없다면서 말이다. 원칙에 충실하게 인큐베이터 안에 넣었지만, 잘못된 형성을 수술할 수 있을 만큼 아이가 충분한 무게에 이를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고, 설사 그렇더라도 아기의 뇌가 아주 많이 익어 버렸기 때문에 거듭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거라고, 토스트를 씹어 삼키며 말하던 그 인턴을 증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린 핏덩이의 부모들을 증오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게 내 자식이었더라면 난 밤낮을 아이 곁에 붙어 보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난 그 애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명령받은 대로 돌보지 않았던 내 탓으로 죽었는지도 모른다. 수술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소아과를 떠나면서 매일 그 아이를 보러 오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다. 마침내 그 아이를 다시 보러 갈 용기가 생겼을 때는 병실이 비어 있었고 난 감히 그 애의 소식을 물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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