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판사님.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한데…… 그전에 여쭤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가엾은 관사는 그래머 랜드에서 가진 게 a와 the 둘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an egg, an apple이라고 할 때의 그 an이라는 건 뭘까요? an도 틀림없이 관사의 것인 듯한데요…….”
관사는 변호사의 말에 대답하려고 했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얼어붙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 새하얘지더니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구문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관사는 몸을 덜덜 떨다가 끝내 고꾸라지고 말았다. --- p.36
명사 씨는 시뻘건 얼굴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존경하는 그래머 판사님, 조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도죄로 형용사 씨를 고소한 명사 씨도 알고 보니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happiness, prettiness, silliness, leverness 등등 ness로 끝나는 거의 모든 단어가 형용사를 가지고 만든 명사입니다. 명사 씨가 그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형용사 씨도 beautiful, useful, graceful 등등 명사를 써서 만든 자기 단어들을 포기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소. 단어를 포기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소. 단어를 만든 것은 좋은 뜻에서 비롯된 것 아니오? 그러니 이웃의 단어를 취해 새로운 단어를 만든 사람은 비난하기보다는 도리어 칭찬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오. 비평가들이여, 형용사 씨의 손을 풀어 주시오. 형용사 씨, 당신이 새로운 단어를 만드는 데 그렇게 솜씨가 뛰어나다는 얘기를 들으니 몹시 기쁘오. 이제 명사 씨에게서 빌려 오든 다른 품사에게서 빌려 오든 당신이 만들고 싶은 대로 단어를 만들 수 있도록 허가해 주겠소. 끝에 붙이는 말이 이것, ful 말고는 없소?” --- pp.75-76
“아! 그건 비밀이에요.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다른 단어를 지배하는 단어는 추가 점수를 받게 될 거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Listen to me.’라는 문장에서 전치사 to는 me를 목적격으로 가져오지요. 그러면 to는 추가 점수를 받게 됩니다.”
“와! 그거 굉장한데요!” 전치사가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저는 늘 명사나 대명사를 목적격으로 지배해요. 그럼 전 매번 2점을 받겠네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요.” 동사 박사가 끼어들었다. “가끔 당신은 내 앞에 오기도 하잖소. to eat, to sleep, to fly처럼 말이오. 그럴 땐 1점밖에 받지 못할 겁니다. 당신이 나를 지배하는 건 아니니까요. 당신도 알다시피 동사는 격 같은 것이 없으니 말이오.” --- p.151
“아, 됐소. 그거면 충분하오. 문장을 결합해 줄 단어가 필요한 거로군. 명사, 대명사, 관사, 형용사, 동사, 부사, 전치사는 할 수가 없을 거요. 내 목록에 남은 건 두 개의 품사뿐인데, 그 지긋지긋한 감탄사와 접……”
“접속사 말씀이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재판장님!” 문 쪽에서 밝은 목소리가 들리더니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접속사는 금속 단추가 달린 코트를 입고, 철도원 모자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모자의 챙에는 ‘C. J.’라는 글씨가 수놓여 있었다. 두 팔 가득 쇠고리 꾸러미를 안고 있었는데, 현실 세계에서 보았다면 물론 쇠고리 꾸러미로 생각했겠지만, 사실 그것들은 접속사의 단어들이었다. --- p.157
모두가 잔뜩 기대에 차서 그래머 판사가 어떤 상을 내릴지 열심히 듣고 있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먼지구름이 판사의 왕관 뒤로 피어올랐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 지루해하고 있던 비평가들이 썩어 가는 낡은 책, 머리(Murray)의 영문법 책, 먼지 쌓인 사전 등등을 끄집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바람에 그래머 판사의 눈, 코, 입에 먼지가 잔뜩 들어갔고, 판사는 콜록콜록콜록콜록 기침을 해 댔고, 급기야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판사가 내리려던 상이 무엇인지는 그날도, 그 이후에도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결국 그 결정은 스쿨룸셔의 친구들에게 넘겨졌다. 이제 스쿨룸셔의 친구들은 다음 이야기를 검토하면서 어느 품사가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지 결정하고, 나아가 그래머 랜드의 위대한 상을 받을 행운의 주인공에게 어떤 상을 내릴 것인지도 결정해야만 한다.
자, 영광의 수상자는 과연 누가 될까?
--- p.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