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많이 다녀서 이런 골목이 낯설진 않거든. 근데 출장으로 다닌 거라 가끔 연인이랑 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하지만 상상만 했지 가능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남자를 만나는 건 이번 생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근데 너랑 이렇게 아무도 없는 낯선 골목을 걷고 있으니, 갑자기 꿈만 같다. 남자친구와 처음 온 도시의 밤 골목을 걷고 있다니! 꿈이 이루어진 건가?!” 말을 하고 나니 감정이 더 벅차올랐다. 나는 스벤에게 뛰어오르듯 매달려 목을 감싸고 먼저 키스했다. 바렌에는 밤새 입맞추고 서 있어도 좋을 그런 골목이 있었다.
--- 「밤새 입 맞추고 싶은 바렌 골목」 중에서
그릇을 치우는 둥 마는 둥 놔두고 늦은 밤 마실을 나섰다. 캄캄한 공원을 가로지르고, 짧은 터널 밑을 지나고, 아무도 지나지 않는 나무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양파 냄새가 나는 입술로 잦은 입맞춤을 하고, 땀이 가득 찬 손바닥을 놓지 않고 오래오래 걸었다. 문득 이런 게 사랑인 건가 싶었다.
--- 「스벤이 해준 저녁식사, 케이제 슈페츨레」 중에서
우리는 돗자리를 깔고 엎드려 음악을 들으며 일을 하고 간간히 키스를 했다. 가끔은 키스를 주로 하고 일도 간간히 했다. 스벤은 티셔츠를 훌렁 벗은 지 오래다. 엎드려 있는 그의 엉덩이에 누워 스테레오 랩(Stereo Lab)의 노래를 듣는다. 후두둑 갑자기 내리는 비는 높은 나뭇잎들이 막아준다. 일을 핑계 삼아 오늘도 멍하니 공원에 누워 있다 갈 것이다. 저녁 7시가 넘자 사위는 더욱 고요하다. 음악과 바람, 나무로 둘러싸인 공원. “파라다이스가 따로 없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들의 은밀한 작업실, 라이제 파크」 중에서
음식이 나올 때마다 순전히 냄새와 입 안에서 느껴지는 식감, 씹을 때 나는 소리와 살짝 만져본 촉감에 의지하며 먹었다. 무슨 맛인지 음미하며 서로 어떤 재료인지 맞춰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먹기 전에 늘 음식 사진을 찍던 습관도 이곳에선 무의미했다. 그 어떤 불빛도 새어 나와선 안 되니까. 음식을 기다리는 중간 중간, 우리는 딥 키스도 하고 스벤이 내 가슴을 움켜잡는 등의 장난도 이어졌다. 아무도 볼 수 없으니 우리는 자유롭고 대담했다. 그러라고 만든 레스토랑 아니겠어?
--- 「어둠이 내려준 은밀한 식사」 중에서
멀리 점점이 떠 있는 불빛만 보이고, 시커먼 물 위에 떠 있을 요트를 상상해봤다. 신비로움보단 새까만 물빛과 어둠 때문에 무서울 것 같았다. 혹시라도 빠지면? 하지만 무서운 와중에 은밀한 생각도 들었다. ‘너 나랑 요트에서 딴 짓하고 싶은 거 아냐?’ 혼자 묻고 혼자 정색. 보름달 아래 나체로 요트 위에 누워있는 상상을 해본다. 무서운데 왠지 해보고 싶은 이 욕망은 뭘까.
--- 「테겔 호수의 세일링」 중에서
처음엔 그가 아프니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주, 그의 말에 내가 위로받고 울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초반에 나는 자주 울음을 삼켰다. 감정을 숨겼다. 남자 앞에서 우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한참 사랑했을 땐 모든 걸 같이 공유한 것 같은데, 그게 언제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연애 따위 사랑 따위 잊고 산 지 오래였다.
--- 「나의 불안이 감기처럼 찾아온 것뿐이야」 중에서
이젠 한국말로 아침 인사도 능청맞게 주고받는 그는 매일 아침 나를 꼭 껴안고 등을 아래위로 크게 쓰다듬어 준다. 그의 큰 손바닥이 등에 닿을 때마다 따뜻한 돌로 마사지를 받는 것처럼 따뜻하고 작은 신음이 난다. “으음. 아이구, 좋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는 ‘세븐 세컨즈 키스(7 seceonds kiss)’를 한다. 자기 전이나 자고 난 후, 아니면 매일 아침 저녁, 눈을 감고 입을 맞춘 채 7초 동안 가만히 있는 것이다.
--- 「세일링, 패러글라이딩 그리고 커들링」 중에서
어느새 옆에 앉은 그가 내 뺨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키스했다. 한번 시작한 키스는 바에 앉은 내내 이어졌다. 처음엔 옆에 앉은 사람들이 쳐다볼까 너무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곧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되었다. 칵테일이 무척 셌는데 그걸 두 잔이나 마셔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에 갈래?” 그도 역시 물었다. 하지만 노. 그는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 「우리 집에 갈래?」 중에서
내게는 3년 넘게 관계를 맺어온 ‘그’ 가 있었다. 친구 사이인지, 섹스 파트너인지, 아니면 섹스까지 하는 친구 사이인지 어떻게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관계의 남자였다. 누가 들으면 꽤나 쿨한 사이라고 하겠지만(나도 그러려고 노력했지만), 그를 더 생각하던 나는, 나를 덜 생각하는 그에게서 알게 모르게 상처를 받았다.
--- 「몸이라도 굴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