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사랑이 지닌 결함이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잃은 것에 대해 절망할 줄 아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울은 그 절망의 심리 기제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우울증은 자아를 변질시키고, 마침내는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까지 소멸시킨다. 우울증은 우리의 내면이 홀로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것은 타인들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능력까지도 파괴한다. 사랑은, 우울증을 예방하진 못하지만 마음의 충격을 완화하는 장치가 되어 마음을 보호해 준다. 약물치료와 심리치료는 우리가 더 쉽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이런 보호 기능을 되살려 줄 수 있으며 그래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이 건강한 상태에서는 자신을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며, 이런 열정들은 우울증의 반대인 활기 찬 목적의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랑은 이따금 우리를 저버리며 우리도 사랑을 저버린다. 우울증에 빠지면 모든 활동, 모든 감정, 더 나아가 인생 자체의 무의미함이 자명해진다. 이 사랑 없는 상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감정은 무의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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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우울증의 역사는 서양 사상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크게 다섯 단계로 나뉜다. 우울증에 대한 고대의 관점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의 시각과 흡사하다. 히포크라테스는 우울증이 본질적으로 뇌의 질환이며 경구용 치료제를 써야 한다고 했으며, 그를 추종하는 의사들은 뇌의 체액성과 경구용 치료제의 체계화에 관심을 쏟았다. 그러다 중세 암흑기에 우울증은 신에게 버림받은 표시로, 우울증환자는 성스러운 구원에 대해 아는 은총에서 제외된 것으로 인식되었다. 우울증이 오명을 얻게 된 것은 바로 이 시기부터였고 극단적인 경우 우울증 환자는 이단자로 취급되기까지 했다. 하지만 르네상스기에 이르자 우울한 천재들(점성술에서 멜랑콜리를 지배하는 토성자리를 타고난 사람들)이 부상했는데 이들의 낙담은 통찰력으로, 이들이 나약함은 예술적 상상력과 복잡한 영혼의 대가로 여겨졌다.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과학의 시대로 뇌의 조직과 기능을 밝혀내고 통제력을 잃은 정신의 고삐를 잡기 위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방법들을 고안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현대는 20세기 초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아브라함(정신과 자아에 대한 이들의 정신분석학적 견해들은 우리가 우울증과 그 원인들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많은 어휘를 제공했다.)그리고 정신질환을 정상적인 정신에서 분리 가능한, 혹은 그것에 추가된 것으로 규정한 에밀 크레펠린의 저서들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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