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책장이 술술 넘어가나 했더니 대사 빼고는 문장들이 죄 현재형 어미를 가졌다. ‘그녀는 글을 썼다’ 하지 않고 ‘쓴다’고 하는 식이어서 지금 한창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진다. 영화 각본 비슷하다. 각본가들이 지문을 그렇게 쓴다. 출신은 못 속인다기보다도 이야기에 걸맞은 형식을 작가가 찾은 결과겠지. 이야기보다도 캐릭터에 맞춘 스타일이겠지. 이 캐릭터는 매사 행동이 시원시원하다. 망설이거나 눈치 보지 않고 돌아보는 법도 없이 막 나간다. 이렇듯 지금 벌어지는 일을 따라가려니 책장 넘기는 손이 바빠질 밖에. 영사기의 모터란 천천히 돌면 안 되는 거니까. 하지만 잘 보면 이 주인공의 맘속에서 작동하는 모터는 여기저기 흠집이 많다. 순정부품이 아닌 부속도 들었고 그래선지 고장도 잦다. 그런 기계를 달고 이 여자, 용케도 팔랑팔랑 살아간다. 무거운 사람이 가볍게 살고자 하니 노력이 많이 들겠다. 연비가 형편없다고 해야 할까, 감정의 연료를 잔뜩 때야 겨우 굴러간다. 사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일조차도 안쓰러워, 나는 책장이 술술 넘어가질 때 심지어 주인공한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던 것이다.
박찬욱(영화감독)
운명의 잔인한 화살 앞에서 어떤 전략이 현명할까? 여기, 불운을 의기양양하게 만들 햄릿의 이항(二項)을 버리고 제3의 길을 택한 여자가 있다. 허허실실 보살행이랄까, 존재론적 선택에 의해 ‘쉬운 여자’가 되는 것. 불운이 더는 자국을 남기지 못하도록 한없이 자기를 연화(軟化)하는 것. 자기를 개방함으로써 자기를 방어하는 것. 이 모순과 역설 위에 갖가지 역설이 중첩된다. 무골의 연체동물 같은 태도 뒤에 단단히 고치를 튼 자의식, 끊임없이 관찰, 판단, 평가하는 ‘쉬운’ 여자의 ‘의식 과잉’, 사고의 표면을 물수제비를 뜨듯 스치며 빠르고 가볍게 던지는 짧은 문장들, 그 사이사이에 끼워 박은 가볍지 않은 아포리즘들까지. ‘베풂’의 이중성, ‘주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역학관계 전도까지. 냉소와 비관주의의 얼굴을 한 이 역설들 속에서 인생에 대한 연민과 궁극적 긍정이 마지막 역설로 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슬픔과 분노, 질문 가득한 시를 쓰던 학생시절에서 박성경이 아주 멀리 왔다는 생각을 한다. 변하지 않은 채로.
심민화(불문학자, 전 덕성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