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은 자연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이다. 멸종은 어느 종의 모든 구성원이 깡그리 죽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유전적으로 한 가족에 해당하는 모든 개체가 영영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조류학자 윌리엄 비비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어느 생물 종족에서 최후의 개체가 더 이상 숨 쉬지 않게 되면, 천지가 한 번 바뀌어야만 다시 그런 존재가 나타날 것이다.” (……)
이 책은 여섯 번째 멸종의 물결에 휩쓸린 어느 종의 이야기이다. 한때 깊은 숲 속에 살았으며 어쩌면 지금도 살고 있을지 모르는 어느 새의 이야기이다. 캄페필루스 프린키팔리스(Campephilus principalis), 흔히 흰부리딱따구리라고 불리는 이 새는 햇살 가득한 숲 천장에서 보란 듯이 잘 살아가다가 겨우 100년 만에 멸종의 그늘에 가려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 100년 동안 물론 다른 종도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흰부리딱따구리는 그 서식지를 파괴하고 팔아넘긴 사람들과 서식지를 보존하여 종을 구하려고 애썼던 새로운 종류의 과학자 및 자연보호 운동가가 줄다리기를 벌인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오늘날 우리가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구할 때 쓰는 기법 중 몇 가지가 그때 흰부리딱따구리를 구하려는 과정에서 개발되었다는 점에서, 이 근사한 새는 현대의 첫 멸종 위기종이었다고 봐도 좋을지 모른다.
--- pp.8~9
윌슨이 20킬로미터를 달려 윌밍턴 시내까지 가는 동안, 새는 내내 비명을 질렀다. 기진맥진한 박물학자, 눈알이 퉁방울이 된 말, 울부짖는 딱따구리라는 요상한 삼인조가 윌밍턴 거리를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문간이며 창가로 나와 내다보았다. 다들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윌슨은 스케치북을 쥐고 그리기 시작했다. 방이라도 남아 있을 때 그려야 했다. 그는 새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피의 대가를 치렀다. 나중에 그는 흰부리딱따구리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새는 내게 여러 군데 상처를 입혔다. 새는 늘 품위가 있었고 불굴의 기상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새를 고향 숲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유혹에 쉴 새 없이 시달렸다. 새는 사흘 가까이 나와 함께 살았지만 일체의 먹이를 거부했다. 나는 후회스런 심정으로 새의 죽음을 지켜보았다.”
--- pp.17~18
흰부리딱따구리 가죽을 가져올 수 있다니! 그러면 박물관은 관람객으로 가득 찰 것이고, 그 표본은 바이어의 과학자 인생에서 최고의 업적으로 여겨질 것이었다. 바이어는 툴레인 대학이 여름방학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과 안내인을 고용하여 길을 떠났다.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7월이었다. 그들은 풀을 베어 가며 모기를 때려잡아 가며, 중순에는 루이지애나 북동부의 야생 습지 한복판에 도달했다. 그 동네 사람들이 빅레이크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사이프러스 나무로 둘러싸인 호숫가의 빽빽한 덤불을 헤치고 들어선 순간, 바이어는 노다지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약간 구슬프면서도 시끄러운 새소리가 제법 자주 들려왔다. 그 일대를 잘 아는 사람들이 ‘큰나무 신’이라고 부르는 새였다.”
바이어는 일주일 동안 흰부리딱따구리를 일곱 마리 발견하여 죽였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은 죽은 느릅나무 꼭대기 가까이에 뚫린 큼직한 사각형 구멍을 발견했을 때였다. 구멍은 무성하게 자란 덩굴옻나무에 가려 있었는데, 큼직할뿐더러 뚫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흰부리딱따구리 둥지였다! 바이어는 이렇게 썼다. “새끼는 한 마리뿐이었고, 구멍의 입구 근처에 있었다. 새끼는 깃털이 거의 다 났고 날 수도 있었지만 아직 부모가 주는 먹이를 먹었다.”
바이어는 흰부리딱따구리 가족을 모두 쏴 죽이고, 나무 꼭대기를 베어서 통째 가져온 뒤, 툴레인 박물관에 그 둥지를 전시했다. 흰부리딱따구리 가족은 자석처럼 관람객을 끌어들였다. 바이어는 툴레인 대학의 학장 W. D. 로저스에게 쓴 편지에서 자랑스러운 듯이 이렇게 말했다(하지만 사실은 틀린 말이었다). “미국 국립 박물관(현재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을 말한다.―옮긴이) 외에는 다른 어느 기관에도 이 종의 표본이 하나 이상 없을 겁니다. 지금 [툴레인] 박물관에 있는 표본들은 250달러는 거뜬히 나갈 겁니다.”
--- pp.28~29
태너와 쿤은 텐사스 강 동쪽 기슭으로 수색을 집중했다. 3월 26일에 그들은 어른 흰부리딱따구리 한 쌍이 존 지류라는 후미진 소택지를 쏜살같이 가로지르는 모습을 목격했고, 이후 나흘 동안 힘겹게 뒤진 끝에 어느 풍나무 꼭대기에 뚫린 둥지를 태너가 발견했다. 부모 새는 한 마리 있는 새끼에게 하루 종일 번갈아 가면서 길고 흰 굼벵이를 먹였다. 새끼는 노상 입을 벌리고 먹이를 달라고 짹짹거렸다.
바로 다음 날, 새끼가 구멍 가장자리로 폴짝 올라앉더니, 균형을 잡고, 날개를 펼치고, 훌쩍 첫 비행에 나섰다. 새끼는 다시는 둥지로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의 주소는 그곳에서 400미터쯤 떨어진 다른 나무로 옮겨졌고, 새들은 그곳에서 매일 밤 함께 잤다.
태너는 자랑스러운 듯이 적었다. “[새끼는] 처음부터 잘 날았다. 이후 두 달 동안 가족은 둥지 근처에서 함께 사냥했다. 새끼는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독립심을 키웠다. 한 달 만에 부모와 함께 집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 7월 중엽에는 어미와 아비만큼 덩치가 커졌고, 강인한 비행사이자 강력한 굼벵이 사냥꾼이 되었다.” 그러나 어린 새가 으레 그렇듯이 새끼는 아직도 부모에게 먹이를 달라고 졸랐다. 태너는 새끼의 능숙함에 기뻤지만, 가족이 알을 하나만 낳았다는 사실이 걱정되기도 했다. “새들은 일찌감치 둥지를 틀었으면서도 둥지를 한 번 더 틀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 pp.143~144
“나는 새를 네 번 봤는데, 모두 3월 16일이었습니다. 그 날에 무슨 마법이 있는 것 같아요.” 히랄도 알라욘은 자기 집 서재에서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했다. 그는 흰부리딱따구리를 마지막으로 본 뒤에도 열 번 넘게 탐사를 이끌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전 세계에서 숲이 쓰러지고 있으니, 조류학계에서 쿠바의 흰부리딱따구리를 찾는 일은 청춘의 샘이나 엘도라도를 찾는 것에 비할 만한 중대한 모험이 되었다. 사방을 둘러싼 책장에 거미가 든 유리병이 줄줄이 놓인 알라욘의 아담하고 깔끔한 집에서, 나는 그에게 흰부리딱따구리가 절멸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그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고는 같은 질문을 받은 미국 과학자들이 똑같이 드러냈던 희망 어린 어조로 대답했다. “새가 멸종했느냐고요? ……글쎄요, 누가 알겠습니까만, 나더러 내기를 걸라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새는 아직 저기 어딘가에 살고 있습니다. 놀라운 새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과 한때 그 새의 보금자리였던 거대한 숲에 대한 사랑을 이어 주는 존재지요. 새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꼭 찾을 겁니다.”
--- p.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