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태어났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농사와 방앗간 일을 하며 고학했다. 19세 때 도쿄산림학교(현재 국립 도쿄대학 농학부)에 입학했으나 첫 학기 시험에서 낙제를 하였다. 비관한 나머지 우물에 투신하여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미수에 그쳤다. 그 후 생각을 고쳐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린 결과 최우등으로 수석 졸업했다. 이로써 낙제할 만큼 우둔한 사람이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무슨 일이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었다.
그로부터 일하고 공부하는‘동학병진’이 취미가 되어 어려운 생활과 고학마저 도리어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산림학교 졸업 후 독일로 자비 유학을 떠났다. 뮌헨대학에서 국가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여 만 25세 나이에 도쿄농과대학으로 이름이 바뀐 모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생애의 목표, 즉 인생계획을‘마흔까지는 근검저축으로 생활의 기반을 다지고, 예순까지는 전신전력으로 학문을 닦으며, 일흔까지는 사회봉사, 일흔 이후는 물 맑고 산 좋은 온천에서 청경우독의 생활’로 정했다.
또한 매일 한 장 이상의 글쓰기, 월급의 4분의 1을 미리 떼어내어 저축한다는 두 가지 규율을 스스로 만들어 지켜나가기 시작했다. 1900년에 정교수로 승진했다. 나이 마흔이 되자 그 동안 모은 저금의 이자가 월급보다 많아졌다.
교직의 여가를 이용하여 내무, 문부, 농림, 철도 등 정부부서와 도쿄부의 고문을 맡았다. 도쿄시내의 히비야공원과 메이지신궁, 그 밖의 여러 국립공원과 철도 방설림, 수원림, 가로수 등의 설계 개량을 맡았다. 또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후 도시계획위원, 정원협회, 도시 미美 협회를 비롯한 17개 단체의 회장 및 부회장 직무를 수행했다. 실업계 거물들의 고문 역할까지 맡아 지치부시멘트, 무사시 수력발전, 닛신고무 등 수많은 개척 식림 사업, 각 지역 수력 발전소의 환경 파괴문제 등을 해결하기도 했다.
만 60세 정년 후에는‘돈이나 명예가 행복 그 자체는 아니다. 많은 돈은 내 자신을 위해서나 자녀들을 위해서나 백해무익하다.’는 깨달음으로 재산의 대부분을 남몰래 사회사업에 기부했다. 그런 다음‘인생은 노력, 노력은 행복’이라는 평소의 모토 아래 다시‘동학병진’이라는 예전의 검소한 생활로 돌아갔다. 그 후 70세까지의 10년 동안 종교, 철학, 역사, 경제, 법률 등의 신간 서적을 탐독했다. 목표로 삼았던“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다닌다.”는 숙원도 달성했다. 당시의 일본인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20여 회에 달하는 해외여행을 통해 세계 방방곡곡을 두루 견문하고 다녔던 것이다. 우연히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알게 되어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하여 새롭게 10년 계획을 세우고 학생시절의 젊음을 되찾아 필생의 노력을 기울여‘신新 인생학’연구에 몰두했다.
1952년 정월, 85세를 일기로 타계하기까지 37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자녀들도 그의 희망대로 잘 자라서 저마다 사회에 이바지하는 인물이 되었다. 문부성 차관과 내무장관을 지낸 사위가 있는가 하면, 손자들도 의학박사와 농학사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직계 손자는 도쿄대학 명예교수인 혼다 겐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