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는 생각했다 : 사랑과 섹스를 연관시킨 것은 창조주의 가장 괴이한 발상 중의 하나이다.
또 이런 생각도 했다 : 멍청한 섹스로부터 사랑을 구해 내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머릿속의 시계를 다른 식으로 조절하여 제비만 보고도 흥분하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이런 나른한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어지럽고 환상적인 공간인 잠의 문턱에서 그는 문득 모든 수수께끼의 해답, 신비의 열쇠, 새로운 이상향, 파라다이스를 발견했다고 확신했다 : 제비만 보아도 발기하고, 공격적이고 우매한 섹스의 방해를 받지 않으면서도 테레사를 사랑할 수 있는 세계.
--- p.273
키치란 존재와 망각 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그러나 그 순간 사비나는 프라하 광장의 연단에 서 있는 이 상원의원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의 얼굴은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들이 높은 연단에서 귿르의 발 아래로 행진하며 미소짓는 시민들에게 보내는 것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p.316 p287
백만분의 일의 상이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오로지 섹스에서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개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며 정복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전만해도 이런 류의 정복은 많은 시간(수주일 심지어는 몇 달까지!)이 요구되었고, 정복된 것의 가치는 정복하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으로 가늠되었다. 심지어 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게 짧아진 오늘날에도 섹스는 여전히 여성적 자아의 신비가 숨어 있는 은빛 상자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를 여자 사냥에 내모는 것은 관능의 욕구(관능은 말하자면 덤으로 따라오는 것이다)가 아니라 세계를 정복(지상에 머무르는 육체를 메스로 개봉하고자 하는)하려는 욕망이었다.
--- p.230
많은 여자를 추구하는 남자는 2개의 범주로 쉽게 나뉘어진다. 한쪽은 모든 여자에게서 자신에게 고유한 꿈, 여자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개념을 찾는다.
낭만적 집착. 여자 에게서 찾는 것은 그들 자신이며 그들의 이상이며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실망하게 된다. 왜냐면 이상은 우리가 알다시피 결코 발견될수 없는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다른쪽은 객관적인 여성세계가 지닌 무한한 다양성을 수중에 넣고자 하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바람둥이적 집착이며남자가 여자들에게 주관적 이상을 투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그 어느것에도 실망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실망하지 못하는 태도 그 자체는 뭔가 추태스러운 것을 포함하고 있다.
--- p. 230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치던 교수는 그녀와 그녀 동료들에게 사회주의 예술을 이렇게 설명했다: 소련 사회는 이미 너무 발전하여 근본적인 갈등은 선과 악 간의 갈등이 아니라 그저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 간의 갈등이다. 따라서 똥(그러니까 본질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저쪽 편>(예를 들면 미국)에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저 좋은 것과 가장 좋은 것>만 있는 세계에 마치 이물질처럼(예를 들면 간첩의 모습을 띄고) 외부로부터 침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어느 때보다도 잔혹했던 이 시절, 공산주의 국가의 극장에 넘쳐 흐르던 소련 영화는 믿지 못할 정도의 천진성에 물들어 있었다. 두 소련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갈등은 연인 간의 오해였다......이런 영화는 공산주의 이상을 그린 것이지만, 공산주의의 현실은 이보다 훨씬 암울했다.
--- pp.289-290
나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집안에서 자랐지만 신의 창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신학적 예비 지식은 조금도 없었지만, 어린 나는 순간적으로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으며 또한 인간이 신의 모습을 따라서 창조되었다는, 기독교의 인류학적 근본 명제가 지닌 허약성을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둘 중에 하나이다. 인간이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그래서 신이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은 신을 닮지 않았거나,고대 그노시스파 사람들도 다섯 살적의 나처럼 이를 분명하게 느꼈다.
이 저주스런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기 위해 2세기 그노시스파의 대가 발랑탱은 예수는 <먹고 마시지만 절대 똥은 싸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는 것이다.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적 문제이다. 신인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으며 따라서 인류의 범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점은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인간을 창조한 신, 오직 신에게만 돌아간다.
--- p.281-282
그것은 하나의 암시였다. 베토벤의 마지막 4중주의 악장은 이 같은 두 동기로 작곡되었다. 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이 단어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달되게 하기 위해 베토벤은 마지막 악장 첫부분에 이렇게 써넣었다.
<신중하게 내린 결정.>
--- p.41 가벼움과 무거움 중에서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는 그녀가 그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은 탐욕을 갖고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단어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단어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절모를 썼을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시키는 것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
--- p.
「이제 아마도 사비나와 프란츠를 갈라놓은 심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그는 그녀가 그녀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탐욕스럽게 귀담아 들었고, 그녀 역시 그의 말을 똑같은 탐욕을 갖고 들었다. 그들은 그들이 서로에게 했던 단어의 논리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했으나 이 단어 사이를 흘러가는 의미론적 강물의 속삭임은 듣지 못했던 것이다. 사비나가 그 앞에서 중절모를 썼을때, 프란츠는 마치 누군가가 미지의 언어로 그에게 말을 시키는 것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이 행동이 음탕하거나 감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의미의 부재로 인해 그를 당황케 하는 난해한 것이었을 뿐이었다. 젊은 시절 삶의 악보는 첫 소절에 불과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함께 작곡하고 모티프를 교환할 수도 있지만(토마스와 사비나가 중절모의 모티프를 서로 나눠가졌듯), 보다 원숙한 나이에 만난 사람들의 악보는 어느 정도 완료되어서 하나하나의 단어나 물건은 각자의 악보에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게 마련이다. 」
---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