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떤 철학자의 세계관을 연구하다 보면 궁극에는 하나의 이마주로 집약되곤 하는 경험을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떠올리는 이마주가 다르겠죠.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어떤 이마주로 귀착할까요? 저는 그의 세계를 종이학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종이를 수십 번 접으면 종이학이 되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수천, 수만 번, 그리고 이것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한한 수로 종이학을 접을 수 있다면, 바로 그렇게 생긴 종이학이 라이프니츠의 세계를 대변해 주지 않을까요? 종이학에서 우리는 꼬리라든가 날개, 부리 등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분되는 무한한 부분들을 포함함에도 궁극적으로 종이학은 하나의 종이였죠. 라이프니츠의 세계는 바로 이런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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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인간은 이름-자리의 격자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 이름-자리에, 사회가 그에 부여한 기능에, 욕망과 권력의 놀이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아름답고 가슴 벅찬 젊은 날의 꿈은 조금씩 말라비틀어지고 이제 이름-자리를 가지고 모든 인간을 바라보는 것에 점차 익숙해집니다. 어릴 때 비틀스가 더 낫다, 레드 제플린이다 하고 싸울 때가 참 좋았죠.
나이가 들면 이제 그런 것들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죠.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조금이라도 더 위로 올라갈려는 처절한 싸움이 있을 뿐입니다. 이 위(位)의 체계를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생각이죠.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 체계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위(位)가 나 자신은 아니라는 것, 나의 정체성이 그 위(位)에 흡수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늘 깨어 있으면서 살아갈 수는 있죠. 우리는 이런 사람을 무위인(無位人)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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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의 과제는 당시의 기계론적 세계관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통합하는 것이었다고 했죠? 그 매개 개념이 힘입니다. 즉 형이상학적 힘과 자연철학적 힘을 구분함으로써 서로를 잇죠.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적 힘을 본래적 힘이라 부르고 자연철학적 힘을 파생적 힘이라고 부릅니다. 나아가 라이프니츠는 또한 능동적 힘과 수동적 힘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네 상의 조합이 가능하죠. 알기 쉽게 말해, 본래적-파생적 쌍은 형이상학적 힘과 자연철학적 힘 사이의 구분이고 능동적-수동적 쌍은 형상의 힘과 질료의 힘 사이의 구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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